열린우리, 창당에서 집단탈당으로 분당까

  • 입력 2007년 2월 6일 15시 15분


코멘트
'백년정당'을 기치로 내걸고 돛을 올렸던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지 고작 3년3개월여 만에 사실상 분당 사태라는 암초에 걸려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07년 대선의 해가 밝았지만 당이 지리멸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거센 정계개편의 격랑에 휘말리면서 출항 초반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와 같은 처지가 된 것·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 11일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40명과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5명, 개혁국민정당 의원 2명 등 47명이 중심이 돼 '왜소'하게 출범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으로 3김 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영호남 지역기반을 양분하고 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틈바구니에서 지역구도 타파와 전국정당 건설, 금권정치 타파 등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걸고 한국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새로운 정치패러다임 구축에 나섰다.

첫 항해에서는 대통령 탄핵 등 소수여당의 비애를 겪는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국회 과반 획득이라는 만선의 기쁨을 맛봤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1월 11일 첫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의장이 선출된 후 상승기류를 타기 시작했고, 이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감행에 따른 거센 역풍 속에 4·15 총선에서 일약 152석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른바 '의회권력' 교체라는 기록도 세웠다.

열린우리당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했다"며 기세등등한 개선장군이 돼 17대 국회의 문을 열었지만, 압승 뒤에는 아득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혁 대 실용'이라는 모호한 정체성 논쟁으로 서로를 깎아내렸고, '백팔번뇌'라는 별칭처럼 108명의 여당 초선의원들은 일체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한 튀는 언행으로 혼선을 가중시켰다.

여기에 당과 원내 지도부를 분리한 '투톱 시스템'은 출발부터 삐걱거렸고, 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중앙위원회는 현역의원들이 배제된 채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개혁당파 출신 인사 등에 장악돼 지도부를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내부적 혼란이 가중된 상태에서 맞은 2004년 첫 정기국회는 열린우리당 추락의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민생과는 동떨어진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입법을 전면에 내걸었다가 한나라당의 육탄저지에 막혀 사실상 좌절되면서 열린우리당의 개혁동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당청 갈등도 여권의 동반추락을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 노 대통령과 여당은 인사와 주요 정책에서 사사건건 충돌했고, 특히 대통령의 인사권을 둘러싼 당청 갈등은 총선 직후 한나라당 출신 김혁규 의원을 총리로 내정하는 과정에서 시작돼 최근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사퇴 파문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여권을 흔들어댔다.

그 사이 현 김근태 의장까지 2년10개월 동안 9차례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정상 지도부 보다는 '비상체제'가 상시화되는 기형적 모습을 보였다.

17대 총선 직후 한때 50% 가까이 치솟았던 지지율은 2년여만에 10% 전후로 급전직하했고, 2005년 이후 치러진 각종 재·보선에서는 '40대 0'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정치권의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버렸다.

이런 가운데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치러진 작년 10·26 재·보선마저 참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정계개편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 지도부의 적극적인 만류로 정계개편 논의가 정기국회 이후로 늦춰지긴 했지만 한 번 터진 물꼬는 열린우리당을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끌고 갔다.

당해체 후 제세력 통합을 주장하는 중도·실용 성향의 통합신당파와 '질서있는 정계개편론'을 내세운 친노(親盧) 성향의 당사수파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당헌 개정, 전당대회 개최, 노 대통령 탈당문제 등 사사건건 대립하는 형국을 보였다.

마침내 통합신당파 내에서는 더 이상 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여론이 비등, 탈당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 사수파는 뒤늦게 자신의 주장을 대폭 후퇴시키면서 당의 분열사태를 막으려 나섰지만, 3년 가까이 방치했던 갈등이 곪을 대로 곪은 상태에서 탈당의 흐름을 되돌리긴 역부족이었다.

지난달 22일 임종인 의원이 탈당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이계안 최재천 천정배 염동연 정성호 의원이 개별 탈당했고, 6일 김한길 전 원내대표와 강봉균 전 정책위의장이 주도하는 집단탈당 사태로 이어졌다.

당 지도부와 사수파는 집단탈당의 아픔 속에서도 14일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합신당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는 입장이지만 당내 상황은 쉽사리 안정될 것 같지 않다.

전대의 성사 여부마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당 지도부로서는 집단탈당 이후 형성된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으면서도 대통합신당을 속도감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이중삼중의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후속 탈당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여전히 당내 다수를 차지하는 통합신당파 의원들은 탈당을 거둬들인 게 아니라 전대 후 지도부의 통합작업을 지켜본 뒤 거취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정당사의 한 페이지에서 나름대로 정치개혁에 기여한 성공한 정치세력으로 규정될지, 실패한 정치실험 집단으로 전락할지 중대한 역사적 기로에 놓여있는 셈이다.

디지털뉴스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