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섭 서울대 교수 “‘87년 체제’라는 말 저의 의심스러워”

  • 입력 2007년 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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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학자인 정종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개헌 문제를 비롯해 우리 헌법 체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홍진환  기자
헌법학자인 정종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개헌 문제를 비롯해 우리 헌법 체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홍진환 기자
《헌법학자인 정종섭(50) 서울대 법대 교수가 최근 ‘대한민국 헌법’을 펴냈다. 헌법 조문과 용어 설명에 사진작가 김중만 씨의 꽃 사진을 곁들인 이 책은 흔히 딱딱한 느낌을 주는 법학 책과는 달리 화보 같다. ‘전국민 헌법 읽기’ 운동을 벌이는 정 교수가 헌법에 대한 국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만든 책이다.

정 교수는 이 책만큼이나 독특하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30대부터 기존 헌법이론을 통렬히 비판하더니 지난해에는 ‘헌법이론의 한국화(韓國化)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은 ‘헌법학원론’을 펴냈다. 또 헌법 읽기 운동을 벌이면서 만화로 헌법을 설명한 ‘정종섭 교수와 함께 보는 대한민국 헌법’ 등 헌법 관련 대중서적도 3권째 냈다. 》

1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정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헌법 읽기 운동을 벌이는 이유를 비롯해 현재의 개헌 논의, 우리 헌법체계와 법적 안정성 등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그는 “내가 30대 때는 기존 헌법이론들을 비판하니까 급진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으나 요즘은 사회가 이렇게 가니까 내가 보수가 돼 있다”면서 “나를 위험하게 보던 사람들이 과거보다 덜 위험하게 본다. 하도 위험한 사람이 많으니까…”라며 웃었다.

―왜 헌법 읽기 운동인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가 뭔지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회의 신뢰가 형성되고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본에서도 1980년대 전 국민 헌법 읽기 붐이 있었다. 국민이 헌법을 한 번만 읽으면 ‘대한민국의 최소한의 합의는 뭔가’ 하고 고민을 해 볼 것이다. 인권조항이 최고법인 헌법에 체계적으로 규정돼 있음을 보면서 국민으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고, 공동체에 애정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 헌법은 독일 일본 프랑스 미국보다 시스템이 더 낫다. 헌법을 한 번만 읽고 나면 질적 변화가 생긴다.”

―기본권 조항이 잘돼 있다면 인권신장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기본권 조항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잘돼 있다. 그러나 헌법을 실현하는 데는 인권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안전과 가치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인권담론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며 지나쳐 공동체와 사회 발전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 내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 독재의 안티테제로 인권을 가져왔다. 인권담론으로 민주화의 추동력을 얻었으나 너무 인권담론에 치우쳤다. 권위체계라든지, 공동체가 보유해야 할 가치, 국가기능도 인권·민주화 담론으로만 보기 시작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도 개혁이란 이름으로 인권·민주화담론에 치우치다 보니 국가 정상화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가안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됐다. 인권 운동 하는 분들도 내적인 성찰을 할 때가 됐다.”

―과도한 인권담론이 국가 시스템을 흔들고 있다는 얘긴가.

“국가 권위체계에는 합리적 권위체계와 비합리적 권위체계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체계는 떨어내야 하는데, 회를 뜨듯이 정확하게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비합리적 권위체계를 떨어내면서 합리적 권위체계도 함께 날아간 측면이 있다. 이런 현상은 김대중 정부 이후 심화됐다. 국가 권위체계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김대중 정부 초기 지점으로 U턴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우리 헌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인가. 그런데 개헌 얘기는 왜 나오나.

“나는 21세기의 시대·사회변화에 맞춰 개헌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에서 개헌하려는 것은 안 된다. 개헌을 하려면 국민적 컨센서스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국민적 합의가 없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내에 개헌을 하려 했다면 임기 2년차부터 논의를 시작해 지난해 8, 9월까지, 늦어도 10월까진 했어야 했다. 대선과 맞물리면 정략이라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진정성이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구체적으로 현재 개헌 논의의 어떤 것이 문제인가.

“개헌을 하려면 역사상 처음 국민이 주체가 된 개헌을 해야 한다. 국민적 개헌이 되려면 국민이 2, 3년 개헌 논의를 숙지해야 한다. 국민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대통령제를 전제로 임기를 일치시키는 개헌을 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개헌을 하려면 먼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에 대한 그랜드 디자인을 해야 한다. 개정 헌법이 헌법적 정당성을 가지려면 이 같은 국민적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돼야 한다. 개정 헌법 내용도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발전할 수 있도록 내용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개헌 논의가 이런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데 (노 대통령은) 개헌에 동의 안 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협박부터 하고 있다.”

―현행 헌법의 기반인 ‘87년 체제’는 이미 수명을 다했으므로 개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87년 체제라는 말은 이론적으로 성립이 안 된다. 한국은 계속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프랑스혁명 때처럼 ‘앙시앵 레짐(구체제)’에 변화가 온 것도 아니다. 내용이 불투명한 실체가 없는 말로, 일종의 ‘낙인찍기’ 전술이다. 87년 체제라는 말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서 개헌해야 하나.

“개헌은 국회 주도로 가야 한다. 국회에서 기구를 만들고, 개헌을 위한 헌법조사를 해야 한다. 헌법 조사 기간은 최소한 2, 3년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뭐가 필요한지 헌법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개헌을 하려면 다음 정부에서 해야 한다.”

―지난달 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가 과거 긴급조치 위반 재판에 관여한 판사 명단을 공개했는데….

“판결문이 공개돼 있으므로 판사 명단 공개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안 되지만, 재판에 참여한 판사를 싸잡아 매도하면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 가령 학자가 긴급조치 위반 재판 사례를 모아 학문적인 보고서를 만든다면 관여했던 판사 명단을 취합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나. 그러나 (과거사위가) 이를 취합하고 공개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특히 과거사위가 (긴급조치 재판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구성원과 직접적인 가치 성향을 표명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등 공정한 구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명단 공개가 문제 될 수 있다.”

박제균 기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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