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핵실험에 당한 이튿날 남북정상회담 들먹이다니

  • 입력 2006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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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 직후 북한의 박길연 유엔주재 대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쓸모없는 결의나 의장성명을 발표할 것이 아니라 우리 과학자들과 연구자들을 축하해 줘야 한다”고 이죽거렸다. 동족을 인질로 ‘핵 불장난’을 벌이고서도 으스대는 그의 사진은 우리 국민의 속을 연거푸 뒤집어 놓는다.

한 달 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제 고생 끝에 낙을 보게 됐다”며 핵실험 강행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지도자의 수준이 이 지경이니 수십만 명의 주민이 아사(餓死)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600억 원을 들여 ‘미사일 발사 쇼’를 벌인 데 이어 2800억 원짜리 ‘핵실험 쇼’를 벌이는 것이다. 오죽하면 형제국가라는 중국조차 “김정일은 두 살짜리 히틀러”라며 ‘징벌’을 거론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정부는 북의 핵실험 바로 이튿날인 그제부터 마치 핵 위기 해결의 묘책(妙策)이라도 되는 양 ‘남북정상회담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북핵 문제 타개를 위해 대북 특사나 남북정상회담의 검토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정상회담 개최는 유용하다”고 가세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핵실험 이후 정상회담을 통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새롭게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상황의 엄중함을 모르는 점에서 남북 지도층이 꼭 닮았다.

대북 포용정책이 파탄에 빠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국제 공조의 강화다. 한국 정부가 김정일 집단을 상대로 핵 문제 해결의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정상회담을 말할 때가 아니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일제히 ‘회담 카드’를 흔들어 보이는 정부의 태도는 ‘자주(自主) 환상’의 산물이거나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어떻게든 약화시켜 보겠다는 ‘김사모(김정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적 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민족끼리’의 헛된 구호와 ‘사탕 주며 달래기’식 대응으로 북한 정권을 한 치도 변화시킬 수 없음은 경험할 만큼 했다.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합의를 통해 경수로 건설과 중유 제공을 대가로 핵을 동결하기로 약속하고도 농축우라늄 개발을 계속했다. 작년에는 우리 정부가 핵 포기를 조건으로 200만 kW의 전력(電力) 송전 등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겠다고 이른바 ‘중대 제안’을 했지만 걷어차고 핵개발에 매진했다.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이 클수록 불량배는 더 막간다는 것은 외교 원리이기 전에 세상 이치다.

애걸복걸해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들 김 위원장의 통치자금을 비롯해 막대한 뇌물을 주고도 북의 선전장만 만들어 주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더욱이 북의 ‘핵 불장난’은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데 목표가 있음이 더 명확해지고 있다. 북이 다음 수순으로 미국에 군축회담을 제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새로운 ‘통미봉남(通美封南)’의 국면이 전개될 공산이 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이 설령 남북정상회담에 응한다 해도 그것은 국제 공조를 교란하겠다는 전술이라고 봐야 한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이 정도는 알 만한 노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띄우는 의도가 내년 대통령선거를 겨냥해 정치적 반전(反轉)을 노린 것이라면 엄중한 국민적 역사적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이제 국민은 ‘정상회담 쇼’에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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