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레임덕 외교’ 피하려면

  • 입력 2006년 6월 22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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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지방선거는 그것이 지방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대선이 아직도 1년 반이나 남았지만 여당 참패의 폭과 깊이 때문에 사실상 정부의 레임덕 현상이 앞당겨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힘과 신빙성은 그에 대한 국민과 다른 나라들의 기대와 판단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하나의 정권이 법적으로는 건재하다고 해도 그들의 인식에 따라 정부로서의 권위가 반감될 수 있다. 이것은 레임덕 정권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현상은 레임덕을 더 부추기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레임덕 현상은 정부 수반의 임기가 정해진 제도 속에서는 불가피하다. 다만 이번에 보통보다 빨리, 그리고 커다란 낙폭(落幅)으로 찾아올 수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외교의 레임덕 현상은 필연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자신의 외교력을 평가절하하여 적극성을 상실하거나 가시적 성과에 급급하여 시간에 쫓기는 모습을 보일 때 그러한 현상을 재촉하고 심화시킬 뿐이다. 한 나라의 정권이 레임덕 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나라들은 최소한 그에 적응하고 나아가서는 이용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 특히 대미관계와 대북관계, 그리고 주변국(중국과 일본) 관계에 있어서 현명한 정책적 선택을 필요로 한다.

지난 3년 반에 가까운 기간, 정부는 ‘자주(自主)’의 레토릭(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는 사실상 미국에 협조하고 친화하는 정책을 취해 왔다. 이라크 파병, 주한 미군기지 이전에 협조, 전략적 유연성의 인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합의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미국도 이제는 우리 정부의 수사와 행동의 양면성을 인식하고 그에 적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계속할 것인지, 수사를 행동에 맞출 것인지, 행동을 수사에 맞출 것인지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를 행동과 같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행동을 과거의 수사에 맞추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대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은 북핵문제 해결의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제공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북한의 핵 문제 해결에 어떠한 정책적 우선순위를 두느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북측은 남한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핵문제 이외의 다른 안건에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양보할 것이 없으면, 없던 선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이미 합의되고 예정된 열차 시험운행을 거부했다가 다시 열어 놓음으로써 남한에 큰 양보를 한 것같이 보이게 만들어 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측이 이러한 게임에 얼마나 동조해 주느냐에 따라 앞으로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결정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가 위협요인이 아니라며 북핵문제를 방치하는 한 북한으로서는 핵문제의 해결은 물론 협상에 들어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주변국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선린의 정책을 취하느냐 적대적 정책을 취하느냐의 선택이 있을 것이다. 중-일과의 관계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가 또는 그중 한 나라와 제휴하여 다른 하나에 압력을 가하느냐의 선택도 중요하다. 상대방의 행위가 괘씸하더라도 항의할 것은 항의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실용적이고 어른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 국가 간의 관계는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금년 9월에 물러날 경우 중-일 두 나라는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회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를 대비하는 정책적 선택도 필요할 것이다.

레임덕 정권이라고 해서 외교 분야에 있어 무력해질 필요는 없다. 동시에 오기(傲氣)의 발동과 소신(所信)의 이름으로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임기의 끝이 가까워 올수록 국내 정치의 단기적인 부담과 제약에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균형 있게 외교정책을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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