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改憲 정치’ 盧대통령 몫 아니다

  • 입력 2006년 5월 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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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초 8, 9개월은 국정 익히느라 바쁘고, 마지막 1년∼1년 반은 재선(再選) 준비하느라 지나간다. 일할 수 있는 진짜 임기는 1년 반뿐이다.”

‘일하는 기간’을 2년 반으로 늘리고, ‘재선 준비’를 ‘정권 재창출’ 혹은 ‘하산(下山) 준비’로만 바꾸면 영락없이 우리의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말로 들린다. 하지만 이는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으로 일했던 사이러스 밴스가 미국식 4년 중임제를 비판하며 한 얘기다.

정작 미국 내에서는 헌법 제정 당시부터 중임제(3선 금지 개헌 이전에는 연임제)의 대안으로 6년 단임제가 줄곧 제기돼 왔다. 최근에는 카터 전 대통령이 대표적 단임제 찬성론자이다. 재선을 위한 정치적 타협과 정치자금 모금 스트레스, 당 내외 라이벌들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각(角) 세우기’에서 벗어나 국가적 어젠다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1913년 2월에는 상원이 6년 단임제로의 개헌안을 48 대 23으로 가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선자로서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우드로 윌슨이 반대하자 이해 3월로 임기가 끝나는 하원이 표결을 미루는 바람에 결국 자동 폐기됐다. 이때 윌슨은 “4년 임기는 무능한 대통령에게는 너무 길고, 유능한 대통령에게는 너무 짧다”는 말을 남겼다.

1947년에도 단임제 개헌안이 상원에 제출됐다. 이때는 82 대 1로 부결됐다.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 논리는 “재선 가능성이 없는 대통령은 그 순간부터 레임덕(권력누수상태)이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책임제의 본거지에서 벌어진 단임·중임제 논란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제도가 결코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학자들 가운데는 권력구조의 문제를 ‘커피냐, 홍차냐’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며, 중요한 것은 ‘운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5·31지방선거 결과가 여권 참패로 결말지어질 가능성이 점차 커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정국 돌파구로서 배수진을 치고 ‘개헌(改憲) 정치’를 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다시 모락모락 일고 있다.

학자들의 지적처럼 1987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노(盧) 3김(金)’의 정략적 타협의 산물인 것도, 한번 뽑으면 탄핵 이외에 다른 견제 수단이 없는 ‘대통령 무(無)책임제’의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일치 필요성도,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출현으로 인한 국정 불안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 카드로서의 개헌론은 국정 실패의 책임을 ‘제도 탓’으로 돌리려는 또 다른 국민기만책이다. ‘여소야대 아래서는 되는 일이 없다’는 논리에서 출발한 연정론(聯政論)의 속편일 뿐이다.

여기서 미국의 단임제 찬성론자들의 논리를 잠깐 패러디해 보자. 어차피 재선의 부담이 없는 노 대통령이라면 이제부터야말로 미래를 위한 국가적 어젠다에 몰두할 때다. 진짜 임기는 이제 남은 1년 반이다. 개헌 논란은 학계에 맡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미동맹 복원 등을 위해 반대자 설득에 몸을 던지는 ‘정쟁(政爭)을 넘어선 대통령’의 모습을 국민은 보고 싶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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