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대한민국과의 계약’이 필요하다

  • 입력 2005년 10월 22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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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스캔들은 없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경구다. 세상의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어떤 스캔들도 좋다는 뜻이다. 강정구 교수 파문도 이와 비슷하다. 자극적인 친북(親北) 발언 한 차례에 일약 ‘통일운동의 스타’가 됐으니 말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강 교수가 나올지도 모른다. 튀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누군들 쉽게 뿌리치겠는가. 문제는 국가적 손실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개탄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사회적 협약’을 맺을 필요가 있다. 국가의 정체성(正體性), 6·25전쟁, 주한미군, 북한 체제를 보는 시각 등에 대해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큰 틀의 합의를 마련하자는 얘기다. 이름을 붙인다면 ‘국가 정체성과 통일 문제에 관한 사회적 협약’쯤이 될 것이다. 1994년 미국 공화당이 작은 정부와 의회 개혁을 모토로 내걸었던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을 본떠 ‘대한민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Korea)’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사회적 협약의 상징성으로 보아 어쩌면 후자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우리처럼 동질성(同質性)의 기초가 튼튼한 사회도 없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에 같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다. 급속한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갈등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이념 수용의 폭은 넓어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민적 합의의 기반을 구축할 때가 됐다. 핵심 가치들을 놓고 “최소한 이것만은 지키자”는 사회적 약속을 할 때가 됐다는 말이다. 그런 게 안 돼 있으니까 강 교수와 같은 얼치기 지식인들이 튀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만 해도 시비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분단 하에서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단시일에 경제 정치 발전을 이뤄냈다면 정체성 논란은 이미 결론이 났다고 봐야 한다. 6·25전쟁도 마찬가지다. 별소리를 해도 남침은 남침이다.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3자가 남한의 적화(赤化)를 위해서 모의 감행한 전쟁이다.

주한미군도 더는 문제가 안 된다. 북한까지도 내심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1992년 6월 24일 하와이 국제학술회의에서 북 대표 이삼로(작고·전 태국대사)가 북측 인사로는 처음으로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해도 좋다”고 했음이 알려지자 운동권의 충격은 컸다. 하지만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북도 이럴진대 왜 우리 측에서 주한미군을 못 내보내 안달을 하는가. 남북관계와 주변 정세의 변화에 맞춰 차분히 논의해 나가면 될 일이다.

이 밖에도 우리가 함께 공감하고 인정해야 할 사안들은 많다.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는 대표적인 예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왜 북한 인권에는 고개를 돌리는가. 자기 부정이다. 이런 사안들만이라도 ‘사회적 협약’의 틀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밤을 새워 토론하고 논쟁하더라도 그 틀 안에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 틀을 벗어나면 엄정한 사회적 징벌이 가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통일논의에 재갈을 물릴 셈이냐고? 그럼 하나만 묻겠다. 2일 남파간첩 출신 장기수 정순택 씨의 시신이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넘겨졌을 때, 그를 기리는 플래카드 중에 ‘통일의 횃불’이라는 추모 구호가 선명했다. 간첩으로 내려왔다 전향하지 않고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가는 그가 ‘통일의 횃불’이면 우리는 뭔가.

범민련 홈페이지를 보면 빨치산 출신으로 보안관찰처분 대상자인 김영승(70) 씨가 띄운 ‘소년 빨치산의 눈으로 바라본 해방’이라는 글이 떠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기자가 “평양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묵묵히 남아서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남아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좌파에게 묻는다. 정녕 통일논의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도 좋다고 생각하는가. 혼돈을 정리해 줄 ‘사회적 협약’이 절실히 필요하다. 제대로 된 정부, 제대로 된 여당이라면 벌써 서둘렀어야 할 일이다. 정치권이 못한다면 민간이라도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걱정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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