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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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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8일. 북한산으로 지목된 ‘슈퍼노트’(100달러짜리 위조지폐) 운반책인 테리 실콕은 영국의 모처에서 구매 희망자 2명을 만난다. 그는 “100만 달러가 이미 런던에 운반돼 와 있다”며 구매를 독려한다. 실콕은 1주일 뒤 이들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21일 북아일랜드로 가 ‘최고위층(숀 갈랜드 북아일랜드 노동당 당수를 지칭)’을 만난 뒤 돌아온다.
#장면 2.
같은 해 6월 24일 영국. 갈랜드 당수를 정점으로 한 ‘슈퍼노트’ 유통 판매 조직원인 데이비드 레빈은 공범인 크리스 코코란과 실콕에게 러시아 비자가 찍힌 위조여권을 건네준다. 이들은 이튿날 갈랜드 당수와 함께 극비리에 모스크바로 날아가 북한 국적의 외교관 또는 정보원과 안가에서 접선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직원은 2, 3개의 국적과 이름이 적힌 위조여권을 소지했다. 또 레빈은 최소 2개의 국적과 4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총책인 갈랜드 당수는 조직원들에게도 문제의 ‘슈퍼노트’가 북한산임을 숨기기 위해 “러시아에서 온 물건”이라고 말했다.》
본보가 13일 단독 입수한 미국 워싱턴 연방항소법원 대배심의 ‘숀 갈랜드 당수 등 북한산 슈퍼노트 유통 및 판매망 일당 7명에 대한 공소장’을 보면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공소장에서 미 수사 당국은 영국 북아일랜드 러시아 폴란드를 넘나들며 정교하게 ‘갈랜드 조직’을 추적한 것으로 나온다. 미 수사 당국이 갈랜드 당수 등 7명을 기소한 것은 5월. 갈랜드 당수가 영국 수사기관에 체포된 것은 7일이다.
24쪽 분량의 공소장에는 1997∼2000년에 이뤄진 갈랜드 조직의 범행 계획, 위조여권 사용, 북한 공작원과의 접촉, 위조지폐 구매자와의 흥정 등 111건의 행적이 시간대별로 정리돼 있다. 관련국들에 전화 감청 정보 등을 제공하며 국제적인 공조 수사를 통해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개가를 올렸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들이다. 미 수사 당국은 공소장에서 “추가 공범자 10명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만 공개한다”고 밝혔다.
조직원끼리는 슈퍼노트를 ‘재킷(jacket)’ 또는 ‘서류작업(paperwork)’이라는 음어(陰語)로 불렀다.
공소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1990년대 초 아일랜드의 은행과 환전소가 북한산 슈퍼노트 유통을 차단하기 위해 100달러 지폐의 환전을 중단했고, 1996년엔 미 재무부가 100달러짜리 지폐의 도안까지 바꿨지만 ‘북한산 신권 슈퍼노트’가 곧바로 유통됐다는 것이다. 미 수사 당국은 갈랜드 조직이 1990년대 말 새 슈퍼노트 유통에 앞서 구 위폐를 대량 폐기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공소장은 또 곳곳에서 북한을 ‘원출처(ultimate source)’ ‘진짜 출처(true source)’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더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주범 갈랜드 당수가 북한 외교관 및 공작원과 모스크바에서 정기적으로 접촉했고, 이들이 북한 외교행낭을 범죄에 사용했다는 정도가 나올 뿐이다. 미 수사 당국이 전모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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