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대표단 국립묘지 참배]55년간의 상처… 5초 묵념으로…

  • 입력 2005년 8월 15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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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의 안에선…정동영 통일부 장관(가운데)과 김기남 북측 당국대표단장(정 장관 왼쪽)이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를 관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축전의 안에선…
정동영 통일부 장관(가운데)과 김기남 북측 당국대표단장(정 장관 왼쪽)이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를 관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4일 남북 분단 이후 처음 이뤄진 북측 대표단의 국립묘지 참배는 5분간의 짧은 방문으로 끝났다. 헌화와 분향 절차가 생략됐고 방명록 서명도 없었다. 단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묵념만 있었다.

▽참배 상황=이날 오후 2시 59분경 대형 버스로 국립묘지에 도착한 북측 대표단 32명은 당국대표단장인 김기남(金基南) 노동당비서와 민간대표단장인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을 선두로 현충문에 들어섰다.

북측 대표단은 오후 3시 2분경 걸어서 참배 장소인 현충탑에 도착했다. 고경석(高庚錫) 현충원장과 송기오(宋基吾) 현충원 현충과장이 좌우에 서서 대표단을 안내했다. 국군의장대 10여 명은 받들어총 자세로 북측 대표단에 예우를 갖췄다.

현충탑 앞에 도열한 대표단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해 묵념”이라는 집전관의 안내에 따라 5초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 뒤 곧바로 돌아 나왔다. 참배를 마치고 버스로 되돌아오는 데까지 단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축전의 밖에선…
14일 오후 8·15민족대축전 개막식을 앞두고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보수단체 회원이 축전 반대시위를 하려 하자 경찰들이 겹겹으로 에워싸며 봉쇄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국립묘지의 공식 참배 절차는 통상 헌화, 분향, 묵념 순 등으로 진행된다. 북측은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동상 등을 참배할 때는 헌화는 하지만 분향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이 밝힌 참배 이유=북측 인사들은 이날의 참배가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낡은 이념의 대결을 넘어 새로운 남북 화해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임동옥(林東玉)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서울에 도착한 직후 임동원(林東源·세종재단 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에게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전 이 문제(김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남측 대표단이 참배하는 문제)로 얼마나 싸웠느냐”고 반문한 뒤 “언젠가는 넘어야 할 관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북측 단장은 참배의 대상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고 돌아가신 분’으로 한정했다. 김 단장은 이날 참배에 앞서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의 환담에서 “광복절을 즈음해 방문하니, 조국 광복을 위해 생을 바친 분이 있어 방문하겠다는 의견을 제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6·25전쟁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참배를 통해 금기를 깨려는 전향적인 결단이라는 정부의 의미 부여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

한편 북측 대표단의 한 관계자는 본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것이고 대상자는 묘지에 안치된 분들을 포괄적으로 참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측 대표단이 방북 시에도 비슷한 예를 표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럴 용기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北대표단 참배… 정치권-전문가 시각▼

북한 대표단이 14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것에 대해 학계와 정치권 등은 대체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보수성향의 인사들은 북측의 이런 파격 행동에는 보이지 않는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며 경계심을 보였다.

▽“새로운 남북관계를 여는 계기”=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南成旭) 교수는 “북한 측의 참배가 가장 낮은 단계인 묵념에 그친 것은 6·25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유감 표명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며 “남북이 서로 주적관계라는 인식에 대해 북한도 아직 완전히 입장정리를 하지 못한 듯하다”고 풀이했다.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金根植) 교수는 북측의 이번 참배가 민족공조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상징적인 제스처라며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김 교수는 “북한이 지금까지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깬 것은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자는 물론 민간 인사도 지금까지 국립묘지를 찾은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참배가 새로운 남북관계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다른 북한전문가들도 이번 참배가 남한 내 강경 보수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경우 정부도 보다 전향적으로 남북 교류를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난항을 겪고 있는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열린우리당 전병헌(田炳憲)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남과 북의 신뢰관계가 한 단계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밝혔다.

여권에서는 이번 참배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도 각각 논평 등을 통해 “북측의 특별한 결정에 대해 남측도 마음을 열고 대응해야 한다”며 반겼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한나라당 등 보수층과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측의 진정성을 따져 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한나라당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은 “일단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북한 특유의 심리전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는 만큼 김 위원장의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신중론을 펴는 이면에는 남측 인사들의 방북 시 금수산기념궁전이나 북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 대성산 혁명열사릉 참배를 요구받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깔려 있다.

‘애국열사릉’ 등에 대한 참배는 전쟁 피해자인 남측으로서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보법상 찬양, 고무죄로 처벌된 전례가 있는 만큼 결국은 남한 내 보수-개혁 간의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북한대학원대 최완규(崔完圭) 교수는 “누구도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며 “북한의 변화 판단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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