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료 15만t 추가지원]“올 농사 실패땐 대량餓死” 北 절박

  • 입력 2005년 6월 22일 03시 05분


코멘트
9일 함경남도 함흥시 부민협동농장의 예술선전대원들이 모판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들과 농촌지원자들 앞에서 격려공연을 하고 있다. 올해 농사를 국가의 ‘주공전선’으로 규정한 북한은 “볏모는 원수의 가슴에 날아가는 멸적의 총알”이라며 쌀 생산과 반미투쟁을 직결시키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
9일 함경남도 함흥시 부민협동농장의 예술선전대원들이 모판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들과 농촌지원자들 앞에서 격려공연을 하고 있다. 올해 농사를 국가의 ‘주공전선’으로 규정한 북한은 “볏모는 원수의 가슴에 날아가는 멸적의 총알”이라며 쌀 생산과 반미투쟁을 직결시키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

20일 북한 조선중앙TV. 화면에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칡뿌리로 음식을 만드는 장면, 전기 부족으로 열차가 멈춰 서 있는 장면이 아무런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1990년대 중·후반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한 대목이다.

1990년대 이야기지만, 북한 TV가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장면을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큐멘터리는 식량난과 에너지난이 극심했던 1990년대 중·후반을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중앙TV가 ‘고난의 행군’을 방영한 배경은 뭘까.

▽제2의 고난의 행군 준비=북한 당국은 지난달 중순 내부 주민강연을 통해 ‘제2의 고난의 행군’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식량계획(WFP)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올여름 북한이 1990년대 중반과 맞먹는 기근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할 정도로 심각한 식량난이 직접적인 계기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권태진(權泰進) 박사는 “기후사정으로 농사적기가 1주일 정도 늦어지고 비료도 제때에 주지 못했다”며 “비록 농사가 잘돼도 최소 100만 t의 식량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구나 2월 10일 핵 보유 선언 이후엔 국제사회의 식량지원까지 끊겨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북한은 이에 따라 올해 농사에 ‘체제의 사활’을 걸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당장 올해 초부터 내부적으로 추진해온 농업개혁을 취소하고 집단주의적 농업시스템을 총가동해 먹는 문제를 풀기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봄부터 15∼20명 규모의 생산단위인 분조를 2, 3명으로 쪼개는 개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외부 환경의 악화로 농업자재와 비료 지원이 어려워지자 농업생산 개혁을 중단하고 다시 집단농장 체제로 승부수를 띄우려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 북한 전역의 인력 대부분이 농촌에 총동원됐다.

여기에는 농업제도의 전면개혁이 내부적 혼란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료=그래도 관건은 비료다. 권 박사는 “북한의 농업생산성을 100으로 치면 비료와 자재가 차지하는 비율이 70%”라고 말했다.

비료가 없으면 대량 아사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북한 당국은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비료를 지원해주는 남한에 절대적인 기대를 걸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을 면담한 바로 다음날 북한이 한국 정부에 비료 15만 t 추가지원을 요청한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이미 지원된 비료 20만 t에 대한 통제도 전례 없이 엄격하다.

비료수송차는 보안원(경찰)이 직접 농장까지 호송하며, 비료를 빼돌리면 엄한 처벌이 따른다. 지난해만 해도 관계자들은 항구에 도착한 비료를 기름값, 식사비 등 각종 명목으로 빼돌려 장마당에 팔곤 했지만 올해는 이런 비리를 저지르면 즉시 해임 처분된다.

북한이 김정일-정동영 면담을 시작으로 당분간 남측을 향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도 남측의 대북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남측의 대북 비료지원이 오히려 역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올해 농사가 잘되면 북한은 사회주의 농업체제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내년에도 집단주의적 농경방식을 계속 고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흉작이 닥치고 아사자가 발생한다면 농업개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올해 작황은 6자회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南成旭) 교수는 “북한은 식량난이 악화돼 내부통제가 어려우면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6자회담에서 적절한 타협전술을 쓸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