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문홍]호랑이와 고슴도치

  • 입력 2005년 2월 17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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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에서 북한 단신 한 토막이 눈길을 끌었다. 평양방송이 소개했다는 호랑이와 고슴도치의 싸움 이야기다. 북한판(版) 우화(寓話)의 결론은 안 봐도 뻔하다. 북한 사람들의 머리에서 고슴도치(북한)가 호랑이(미국)를 혼내 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결말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우화처럼 극적이지 않다. ‘통 크게’ 핵 보유를 선언했음에도 호랑이는 오불관언(吾不關焉), 싸움을 건 고슴도치로선 답답할 만도 하게 됐다. 미국과 한판 크게 거래를 터보자는 속셈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돌이켜 보면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북한에 절체절명의 과제는 북-미관계 개선도, 경제난 극복도 아닌 정권 유지다. 주민 삶을 개선시킬 개혁 개방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국제사회 편입도, 정권 유지라는 대전제가 충족된 다음의 얘기다. 그 목적을 위해 ‘핵 카드’는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써야 한다. 설령 협상이 실패해도 계속 핵 보유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은 북한에 양수겸장의 카드다.

미국은 북한에 일단 6자회담에 나와서 얘기하자고 한다. 핵만 포기하면 ‘대담한 접근’으로 체제를 보장해주겠다는 당근도 이미 내놨다.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한 카다피를 봐라, 당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김정일 위원장을 회유한다.

하지만 북한은 이 약속을 믿을 수가 없다. 미국이 내민 당근에 ‘독약’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보수 그룹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정권교체, 체제변환 등의 얘기가 단적인 예다. 이건 그보다 전에 나왔던 체제붕괴론에 비하면 완화된 표현이지만, 북한 입장에선 결국 그게 그 소리다. 더욱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는 1980년대 말 구소련 및 동유럽 체제전환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본심’이 바뀌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이 선뜻 6자회담에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남한을 적극 활용하면서 미국을 압박하는 전략을 다시 한번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은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측면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북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미국은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체결하던 시절의 미국이 아니며, 북한 자신도 그때의 북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국은 북한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게 된 반면 북한 체제의 ‘피로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 핵 보유 선언도 시간 벌기 이상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시를 곧추세운 평양 고슴도치의 고민은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덩달아 고슴도치의 남쪽 배다른 형제의 고뇌도 깊어져만 간다. 과연 고슴도치는 걱정거리를 해결하고 호랑이와 공존할 수 있을까. 호랑이는 고슴도치가 탈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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