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2004뉴스]<1>대통령 탄핵

  • 입력 2004년 12월 19일 18시 15분


코멘트
탄핵안 가결3월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가운데)이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 속에 국회 경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동아일보자료사진
탄핵안 가결
3월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가운데)이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 속에 국회 경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동아일보자료사진
“어, 어, 어어어….”

3월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순간적으로 말을 잊었다. 설마 했던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탄핵안 가결 직후 본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석을 향해 명패와 서류 뭉치를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고,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만 해도 야당 의원들 중 그 누구도 탄핵안 가결이 몰고 올 엄청난 ‘후폭풍’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이 2월 두 차례 회견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적시했다.

대통령 복귀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은 헌법재판소의 탄핵기각 결정이 내려진 직후 권한대행을 맡아온 고건 총리를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탄핵소추를 끌어낸 결정적 동인(動因)으로는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과 최병렬(崔秉烈) 한나라당, 조순형(趙舜衡) 민주당 대표의 ‘결단과 공조’를 꼽을 수밖에 없다.

당시 의사봉을 쥔 박 전 의장은 막판까지 야당의 애를 태웠다. 막판까지 여야 간 절충을 기대하며 본회의 사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박 전 의장이 강경론으로 선회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노 대통령의 유감 표명과 탄핵안 철회’의 일괄타결안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표결 직전 청와대가 자신의 중재안을 거부한 데 그는 격앙했다. 탄핵안 가결 직후 그는 “청와대는 협상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최 전 대표가 강경 대응을 고수한 배경도 궁금한 대목이다. 측근들이 “탄핵은 발의용이지 가결용은 아니다”라고 한 목소리로 건의했는데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우선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당’ 꼬리표가 붙은 한나라당이 정국 반전의 돌파구로 여겼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와 함께 최 전 대표가 탄핵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았다.

정치권에선 탄핵이 성사되면 그가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최 전 대표는 이를 부인했다. 한 측근 의원은 “그가 ‘미국과의 교감설’을 흘리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보수 진영에서 ‘조순형 대망론’이 흘러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조 전 대표는 법리적 명분을 앞세워 탄핵 드라이브를 주도했다. 지난해 노 대통령의 ‘분당(分黨)’ 추진에 대한 배신감도 밑자락에 깔린 듯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2야(野) 공조’는 두터워졌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영·호남 지역갈등 극복을 명분으로 ‘2야 합당론’까지 모락모락 피어나왔다. 지난해 12월 조 전 대표는 단식 중이던 최 전 대표를 방문해 “한나라당이 당신을 버려도 나는 끝까지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한나라당에선 탄핵 찬성과 공천을 맞바꾸려는 ‘물밑 거래’도 이루어졌다. 한 의원은 “표결 직전 고위당직자로부터 압력 전화를 받고 밤새 고민하다 공천 때문에 표결에 참가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치적 절충 대신 ‘정공법’을 택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많았다. 3월 초 탄핵안이 발의되자 청와대 참모들은 “야당을 상대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으나 노 대통령은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선을 그어 버렸다.

일각에서 노 대통령이 4·15총선에서 여당의 압승을 위해 탄핵소추라는 막다른 길로 야당을 밀어 넣는 치밀한 각본을 꾸몄다는 관측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가까운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아무 계획 없이 탄핵안 표결을 방치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탄핵 정국이 유리하게 끝나는 것을 보니까 ‘선거는 큰 판이 중요하다’고 한 노 대통령의 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탄핵의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다. 광화문 일대에선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정치권이 과연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있느냐”는 논리가 국민의 정서를 파고들었다. 법리(法理)와 국민 정서의 괴리는 커 보였다.

이 과정에서 TV 방송은 탄핵안 가결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울부짖는 장면을 집중 보도해 ‘편파성’ 시비에 휩싸이기도 했다.

후폭풍의 위력은 4월 15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넘긴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을 차지했고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민주당은 탄핵안 가결 직전 62석에서 총선 후 9석의 ‘초미니 정당’으로 전락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