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국교정상화 진두지휘…김동조 前외무부장관 별세

  • 입력 2004년 12월 9일 18시 54분


코멘트
1965년 6·3사태 등 국민적 반대 속에 타결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비준서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이 국교정상화 교섭 수석대표였던 김동조 전 외무장관.-동아일보 자료사진
1965년 6·3사태 등 국민적 반대 속에 타결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비준서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이 국교정상화 교섭 수석대표였던 김동조 전 외무장관.-동아일보 자료사진
9일 별세한 해오 김동조(海吾 金東祚) 전 외무부 장관은 격동기 한국 외교의 최전선을 담당한 ‘외교 사령관’이었다.

일본 규슈(九州)대 법대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고인은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 근무하다 광복 후 미군정 경남도청 이재과장,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체신부 장관 비서실장, 감찰국장을 거쳐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을 시작으로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대사관 참사관, 외무부 차관, 초대 주일대사, 주미대사 등을 거쳐 1973년 외무부 장관에 오르기까지 고인은 냉전시대 한국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당시는 특히 한일, 한미 관계가 급변하던 때였다. 고인은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미국이 중립과 내정 불간섭을 지켜야 누가 당선되든 한미 관계가 순탄할 것이라는 현실론으로 미국을 설득했다.

1951∼1965년 14년간 진행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수석대표로 한일수교를 진두지휘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베트남전 파병과 국군 현대화계획 교섭의 막후에서 대미외교를 주도했다.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유신 개헌 등 정치적 격동기마다 그는 한미, 한일 관계를 조율하는 위치에 있었다.

고인은 ‘회상 30년 한일회담’ ‘회상 80년, 김동조의 회고록’ ‘냉전시대 우리 외교’ ‘한일의 화해’ 등의 저서를 남겼다. 회고록 ‘냉전시대 우리 외교’에서는 한일회담과 관련해 철저히 실리주의를 택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주미대사 시절 발생한 ‘박동선 로비사건’으로 인해 당시 미국 청문회에까지 서야 했던 아픈 기억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두만씨와 장남 대영(해오실업 사장), 차남 민영씨(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2남 4녀가 있다. 손명원(스카이웍스솔루션코리아 부회장) 허광수(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정몽준 씨(국회의원, 아산재단 이사장) 등이 사위. 헤럴드미디어 사장인 홍정욱씨가 외손녀 사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3일 오전 8시. 02-3010-2270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