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영균/前정권 탓, 언론 탓

  • 입력 2004년 7월 14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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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세 개의 봉투를 맡겼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순서대로 뜯어보시오”라는 당부와 함께.

취임 뒤 첫 시련을 맞은 새 대통령이 첫 봉투를 열어보니 “전임자의 탓으로 돌리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대로 해서 첫 난관은 뚫고 지나갔으나 얼마 뒤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두 번째 봉투에는 “언론 때문이라고 말하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이번에도 적힌 대로 말해서 난국을 넘길 수가 있었다.

세 번째 위기가 찾아오자 세 번째 봉투를 뜯었다. “이제 당신도 세 개의 봉투를 준비하시오.”

근거 없는 얘기라고 무시하고 싶지만 과거 이런 경우를 흔히 경험했다. 정책이 실패했거나 실수를 했을 때 정치권이나 정책당국자들이 보여준 ‘책임 전가(轉嫁)’ 행태는 국민들에게 실망과 낭패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일단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 미루는 게 습관화됐다.

경제난국에 대처하는 현 정부의 해법도 구식 ‘책임 전가’의 행태를 빼닮았다. 처음에는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하다가 전 정권의 책임으로 돌렸다. 김대중 정권이 과도하게 경기부양책을 쓴 탓에 신용불량자가 늘었고 그 때문에 지금 내수가 엉망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경제는 나아지지 않자 이제는 언론이 위기를 부추긴다면서 언론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언론이 경제가 나아진다고 쓴다고 과연 경제가 나아졌을까.

지난해 ‘카드대란’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전 정권의 실책이라고 했다. 감사원 특감은 전임자의 실책을 확인하고 면책을 받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걸까. 특감 결과 카드대란은 금융 감독시스템의 실패 탓이라는 보도다. ‘조직 유죄, 사람 무죄’의 결론이라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게 된다.

당시 부실 카드회사에 거액을 수혈했지만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얼마 전 산업은행 총재가 카드회사에 1조5000억원을 추가로 넣어야 한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앞으로 카드회사의 부실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 정부는 뭐라고 할까. 지난달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로 금융기관장을 불러 언급한 대목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LG카드 사태를 거론하면서 “과거 금융위기때 금융권이 ‘나 먼저 살자’고 자기몫 챙기기에 급급했다”고 비판했다.

부실한 금융회사가 쓰러지게 되었을 때 다른 금융회사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금융감독원과 한국은행은 바로 이런 사태에 대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시스템에 책임을 지지 않는데 어떤 외국자본이 투자하려고 하겠는가.

요즘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나아질 것이라던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남의 일인 양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곤경에 처하면 먼저 전임자와 언론에 책임을 미루는 버릇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은 멀어질 뿐이다. 국민들은 당당하게 책임을 지는 정부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믿음이 가고 신뢰가 생긴다. 정부가 실책과 실수를 인정하고 설득에 나선다면 국민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박영균 경제부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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