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희/‘김혁규 카드’ 상생의 길은…

  • 입력 2004년 5월 28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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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기각 이후 노무현 정부 2기 출범이 국무총리 퇴진과 지명의 혼선으로 매끄럽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료 임명 제청권 행사를 거부한 고건 전 총리는 결국 청와대와 껄끄러운 상태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개혁 대통령, 안정 총리’의 균형을 강조하며 함께 호흡을 맞춰 온 고 전 총리가 흡족한 모습으로 떠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소폭 개각을 계획하고 있던 노 대통령의 정국 구상은 총리와의 사전 조율이라는 상식 수준의 절차를 소홀히 함으로써 실현될 수 없었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이라는 헌법의 기본 정신을 소홀히 생각했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명분 약하고 야당도 반대▼

문제는 지금부터다. 신임 국무총리가 순조로운 절차를 거쳐 자리를 잡아 국정운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모양새가 흐트러지고 있다. ‘김혁규 카드’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물론이고 민주노동당도 개혁성 부재를 내세워 불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며칠 전부터는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도 김혁규 전 경남지사의 정체성을 문제 삼아 총리로 적절치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17대 국회의 구도와 국민 여론의 향배를 신중히 고려해 김혁규 카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이 김 전 지사를 총리로 기용하고자 하는 데에도 명분은 있다. 지역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의 취약지인 영남 출신 인사를 중용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한나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긴 ‘결심’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을 총리로 지명하겠다는 모습에서 사나이 세계의 의리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명분의 이면에는 허상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지역구도의 타파라는 명제에 반대할 국민은 없다. 그러나 김 전 지사를 국무총리로 내세움으로써 지역구도를 불식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김혁규 카드를 일찍 꺼내 들어 6월 5일 재·보궐 지방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어 보려는 속셈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명분은 무척 약해졌다.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하면 대통령이 큰 선물을 줄 것’이라는 김 전 지사의 발언은 병살타를 날린 셈이다.

사실 지역구도의 타파를 위해 굳이 영남 출신 총리후보를 임명하려는 사고 역시 지역주의 정치문화의 소산이다. 강원도나 제주도, 경기도 출신의 총리, 남북화해를 위해 이북 출신의 총리를 임명하는 게 오히려 적절한 것은 아닐까. 노 대통령이 김 전 지사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를 총리에 임명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혔다면 이 역시 허상이다.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보면 김 전 지사가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꾼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정국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 63일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면서 내놓은 대국민 담화의 골자는 안정적 국정 운영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류 정치세력으로서의 자신감이다. 국회 안에 소수의 지지 기반만을 가져 정치를 하기 어려웠을 때에는 밀어붙이기 식의 정치나 돌파의 전략이 종종 유용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 국회 과반수의 다수당을 기반으로 한 노 대통령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보다 유연한 전략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안정적 국정운영에 역효과▼

김 전 지사의 총리 지명도 같은 맥락에서 재고해야 한다. 국정 2기 초반부터 밀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 상생의 정치를 대통령이 먼저 실천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밥그릇을 위해 이야기하는 상생은 오래 못 간다’는 조계종 성수 스님의 말씀이 귓전에 새롭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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