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허허벌판 회담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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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평양에서 열린 14차 남북장관급회담은 한편의 드라마 같은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7일 오전 공동보도문을 발표한 남측 대표단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내세울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 대표단의 표정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정세현 통일부장관이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북측으로부터 ‘반전의 신호’가 왔다. 예정에 없던 수석대표 접촉을 하자는 연락이었다. 10여분 뒤 정 장관을 만난 권호웅 북측 수석대표는 “군부가 군사당국자회담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상 결렬’이던 회담이 ‘장성급회담 개최 합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북 양측은 공동보도문을 수정해 다시 발표했다. 남북회담은 물론 국제 회담사에도 전례가 없는 소동이었다. 북한이 회담 절차까지 무시하며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은 용천 참사 이후 남측의 대대적인 지원을 의식한 변화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장관급회담 5일 뒤에는 ‘26일 금강산에서 장성급회담을 갖자’는 구체적 제의가 북측으로부터 날아왔다. 일자와 장소가 제시됐으니 회담이 성사돼 군사적 긴장 완화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할 만한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그렇다고 낙관할 단계는 아니다. 좀 더 시야를 넓히면 군사회담에 대한 북한의 소극적 태도가 보인다. 특히 어제 열린 남북 연락장교 회담이 마음에 걸린다. 북은 남의 판문점 개최 요구를 거부하고 경의선 남북관리구역 군사분계선(MDL) 위를 회담장소로 관철시켰다. 허허벌판 길 위에서 만난 남북 군인들이 진지한 논의를 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북한이 2월 장관급회담 합의사항인 군사회담을 3개월째 무시한 것도 정상은 아니다.

▷군사분계선 주변에는 남북한 장교들이 마주앉을 만한 건물이 많다. 양측 군인들은 경의선 철도 도로 연결을 위해 자유의 집(남측)과 판문각(북측)에서 이미 여러 차례 만났다. 경의선이 통과하는 남북관리지역에도 500m 사이를 두고 남북의 경비초소가 서 있다. 북측은 치밀한 계산을 했을 것이다. 건물이 없어서 ‘선상(線上) 회담’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북은 군사회담을 대충 치르려 하는데 우리만 크게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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