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방석호/‘대통령의 윤리’가 무너지면…

  • 입력 2004년 2월 27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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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규탄대회를 열어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 선거개입 중단을 촉구하며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탄핵도 불사하겠다고 외쳤다. 노 대통령이 취임 1주년 토론회에서 한 말을 보면 야당이 그럴 만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실 잘했는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식의 얘기도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정도는 이제 익숙해져서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선에서 여당을 전적으로 지지해 달라고 한 부분과 스스로 경선 자금을 불법으로 모금해서 썼다는 것을 당당히 밝힌 부분은 도대체 이 나라가 법이 지켜지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선거법-정치자금법 몰랐을까 ▼

측근의 법 위반 사실 때문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할 정도로 도덕적 청렴성을 강조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자신의 법 위반을 시인하며 오히려 그런 얘기는 이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 사실을 법조인 출신의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법 문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옛날 왕조 시대의 왕도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국법이라는 것도 있었고, 원로대신들의 의견이나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간관의 직언, 역사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기록하는 사관의 붓도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왕의 도리를 일깨워주는 윤리가 흐르고 있었다. 그 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서 사회 질서를 형성했고 보이지 않는 규범을 만들었다. 그래서 왕이 윤리에 어긋나는 전횡을 일삼으면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고, 역사는 그를 왕(王)이 아닌 군(君)으로 강등해 기록하기도 했다.

지위와 역할에 따른 윤리는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대통령이 여당 지원을 국민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요청하고 법을 위반한 사실은 잊어달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을,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윤리 의식의 마비를 드러낸 것이다.

나라의 지도자가 법을 무시하고, 법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스스로의 판단과 감정에 의해 정치를 이끌고 간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윤리 의식의 마비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한 것은 법에 의해 탄핵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라기보다는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신뢰를 잃었고, 더 이상 국민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발언이나 잇단 행동이 탄핵 사유에 해당되는지를 놓고 왈가왈부 논란을 해야 할 정도로 현행법이 모호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법 집행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할 때, 윤리에라도 호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윤리가 확립되지 않고, 윤리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면 정의 또한 엄정하게 유지될 수가 없게 된다. 정치인들을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해주는 것은 법에 의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역사의 평가와 국민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윤리적 경각심이다.

총선이 가까워 오고 더 큰 사건들이 드러나면 대통령의 법 위반은 망각 속에서 그 책임을 묻지 않은 채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대통령을 따르는 것은 그가 법에서 자유롭게 ▼법은 국가와 국민 위한 것 ▼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윤리적 채찍을 최소한 스스로는 휘두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정치 상황 속에서 그런 믿음이 지켜질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지만 물은 고기가 없어도 물이다’라는 것만큼은 항상 흐르는 진리다.

방석호 홍익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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