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다면평가제]준비 덜된채 실시…'안면평가'로 변질

  • 입력 2003년 4월 22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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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주된 인사제도로 다면평가를 도입한 주역인 전기정(全基汀) 대통령정책프로세스개선비서관이 지난주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행정 부처들의 다면평가 방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 관심을 끌었다. 전 비서관은 “대통령이 다면평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니까 각 단체장이나 하부 기관장들이 조직의 문화와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전시용이나 과시용으로 급조해서 도입할 경우 다면평가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이강래(李康來) 의원도 “다면평가제가 충분한 준비 없이 수박겉핥기식으로 진행된 기관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말이 있다”며 보완책 마련을 촉구했다. 현 정부 출범 후 각 부처가 실시한 다면평가를 분석해보면 전 비서관과 이 의원의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기투표=가장 큰 문제점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상, 하, 동급자들의 평가를 묻지 않고 특정 직위에 적합한 인물을 묻는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자치부가 실시한 다면평가에서는 ‘여러분이 행자부 장관이라고 생각하시고 부서장 인사를 한번 해 보십시오’라며 주요 1급 직위인 차관보, 기획관리실장, 민방위본부장에 추천할 인사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문항이 있었다. 또 ‘국장으로 승진해 일을 가장 잘할 것 같은 공무원 및 국명’과 ‘비(非)고시 출신 중 승진대상으로 추천하고 싶으신 분’을 3명씩 쓰도록 했다.

건설교통부는 서기관 이상을 대상으로 ‘1∼3급 승진자는 누가 돼야 하는가’라고 물었고 보건복지부도 ‘누가 1급 직책(기획관리실장, 사회복지정책실장)에 적합한 인물인가’라는 등의 문항으로 다면평가를 했다.

▽여론재판=다면평가가 대부분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이뤄져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의견 등에 좌우되는 경우도 많았다.

농림부는 1급으로 3명을 승진시키기 위해 36명의 국 과장을 대상으로, 국장으로 3명을 승진시키기 위해 197명(1급부터 기능직 여직원까지 252명 중 불참자를 뺀 인원)을 대상으로 두 차례 다면평가를 실시했다.

행자부 역시 기능직과 소속기관 6급 이하 직원을 제외한 2급 이하 전 직원을 대상으로 다면평가서를 돌렸다. 이 때문에 행자부로 통합되기 전인 총무처와 내무부의 출신별로 추천하는 사람이 확연히 구분됐다.

재정경제부는 과장급에 대한 다면평가의 경우 1급과 국장급 37명이 하향평가를, 동료과장 78명이 수평평가를, 서기관 이하 일반직원 174명이 상향평가를 했다.

재경부의 한 과장은 “같은 과장급이라고 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평가에 애를 먹었다”면서 “사전에 직무분석을 해 업무 관련성이 있는 사람만 평가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준비부족과 즉흥답변=다면평가가 준비부족으로 즉흥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일종의 ‘이벤트식’으로 치러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국무총리실은 다면평가 문항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종이 한 장에 직급별로 우수한 직원을 5명씩 우선순위대로 써내게 하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실시됐다.

총리실의 한 직원은 “평가기준이 없어 일부 직원들은 ‘에라 모르겠다’면서 동일 직급에서 고참 순으로 적어낸 경우도 있었다”며 “평가 대상인 자신을 1순위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국세청은 이용섭(李庸燮) 신임 청장 취임식이 끝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무관 이상 간부 280여명을 대상으로 1급 인사에 대한 다면평가 설문지를 나눠주고 몇 분 후에 거둬들였다.

건교부와 복지부도 사전예고 없이 다면평가서를 돌리고 곧바로 회수했다.

▽엇갈리는 반응=다면평가에 대해서 인사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는 의견과 공직 사회 내부를 ‘정치판’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위직 직원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고위직으로 갈수록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행자부의 한 고위 간부는 “부하 직원에게 많은 일을 시키는 의욕적인 간부가 평가 점수를 잘 못 받을 가능성이 높아 소신있게 일할 동력이 떨어지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환경부의 인사 관계자는 “과거 일방적 상의하달 문화가 상당부분 사라지고 국 과장이 평직원들과 토론하고 어울리려고 애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하위직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다면평가가 아직은 인사의 ‘참고자료’로 활용돼야지, 승진을 좌우하는 주요한 요인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이현두기자 ruchi@donga.com


▼1998년 해양부 첫 도입…盧대통령 당선후 급속확산▼

공무원 사회에 다면평가제가 도입된 것은 1998년 공무원임용령(대통령령)이 개정되면서부터. 이 개정령에서 승진과 임용 때 동급자와 하급자, 민원인 등의 평가결과를 반영할 수 있도록 근거가 마련됐다.

임용령이 개정된 뒤 다면평가제를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도입해 실시한 부처는 해양수산부였다.

1998년 당시 외환위기 직후 부처별로 인원 삭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양수산부는 구조조정 대상자 선정을 위해 다면평가제를 도입했다.

당시 다면평가는 국장급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각 국장 자리에 최적임자가 누구인지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후 해양수산부 국장급 이상의 인사 고과 제도로 정착돼 가던 다면평가제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한 뒤 과장 이하 직급까지 확대 시행됐다.

또 2001년부터는 공무원임용령이 다시 개정돼 승진 임용 때뿐만 아니라 성과상여금지급과 특별승급, 교육훈련, 보직관리 등 각종 인사관리에 다면평가 결과를 반영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다면평가제를 실시하는 중앙행정기관도 점차 늘어났으며 지난해 5월 중앙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40개의 중앙행정기관이 다면평가의 결과를 승진, 보직관리, 성과상여금 지급, 포상 등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추세는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급물살을 타기 시작해 참여정부 출범 후 거의 전 부처에서 인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다면평가를 시행했다.참여정부에서 다면평가가 주된 인사제도가 될 것이란 점은 지난해 12월 노 대통령당선자 비서실이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직원에 대해 다면평가를 실시한 데 이어 올 1월 임채정(林采正)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앞으로 공직사회에 다면평가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견됐었다.

이현두기자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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