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기자들과 술먹고 헛소리 말라" 경고 이후

  • 입력 2003년 4월 6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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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A행정관은 요즘 하루 3끼를 구내식당에서 해결할 때가 적지 않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 식사하면 기자들과 만났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B국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기자에게 “어지간하면 업무시간 중에 전화를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다. 기자들과 전화하는 것을 동료 직원이 들으면 혹시라도 정보를 유출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최근 공개석상에서 청와대 직원들에게 “기자들과 소주 먹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에 나타난 청와대 비서실의 모습이다.

노 대통령 본인은 4일 청와대 비서동 개방 행사에서 기자들에게 “소주 두어 잔 먹고 실수하는 것이 사실 내 취미인데”라며 농담을 했지만 기자들에게 몸을 사리는 비서실 직원들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대변인에게 물어 보라’=노 대통령 발언 이후 비서실 직원들은 기자의 전화 취재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송경희(宋敬熙)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 이후 추가 취재를 위해 관련 업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면 “대변인이 다 말하지 않았느냐. 대변인이 얘기하지 않은 것은 답변할 수 없다.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하는 일이 잦다.

대변인으로 창구가 단일화하면서 공식브리핑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정책결정의 배경이나 행간을 취재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게 됐다. 대변인 브리핑에 관련 내용이 빠졌을 경우에는 “오후 3시 30분경에 배포하는 ‘청와대 브리핑’을 참조해 달라”고 말문을 닫기 일쑤다.

일부 직원들은 취재에 응하다가도 “대변인이 말한 것 이상을 대답해 주기 어렵다”면서 “나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전화를 끊곤 한다. 비서관들조차도 “수석이나 실장들이나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을 뿐 나는 책임 있는 얘기를 못해 준다”며 취재를 기피한다.

▽‘수석님은 언제나 회의 중’=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있는 수석비서관들은 회의 참석 등 빡빡한 일정 때문에 기자들의 전화 취재에 응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다.

모 수석은 “가끔씩 (기자들의) 전화메모를 발견하지만 업무중에는 개별 취재에 응하기가 사실상 힘들다”며 “공보 관련 업무가 대변인 중심으로 짜여 있어 개별 취재가 들어오면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기자가 전화하면 80∼90%는 비서들로부터 “지금 회의 중”이라는 대답을 들을 뿐이고, 메모와 연락처를 남겨놔도 답신전화를 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기자와의 약속은 잠행으로…’=기자와의 개별 접촉을 금기시하는 청와대 분위기 탓에 직원들이 친분있는 기자와 만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잠행 미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행정관은 “예전에는 기자들과 자연스럽게 만났는데 지금은 눈치를 살펴야 할 사람들이 많다”면서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밖에서 식사할 경우 다른 직원들이 ‘기자와 만나는 것 아니냐’며 의심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기자들과 식사 약속을 하더라도 아예 청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거나 식당에 들어서면 동료 직원들이 없는지부터 먼저 체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고개 드는 내부 비판=취재 제한 조치에 대해 청와대 일각에서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주로 정책부서 관료 출신들이다.

모 비서관은 “업무 성격상 기자들과 자연스레 만나 바깥 얘기도 듣고 정책 방향에 대한 조언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워낙 못 만나게 하니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한 행정관도 “보안을 위해서는 (취재 제한이) 잘한 일 같지만 너무 단속하는 바람에 자칫 정책이 탁상공론으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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