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시대]"大勢보다 大義"…소신정치 외길

  • 입력 2002년 12월 20일 00시 14분


▼노무현 당선자의 인생역전▼

‘계란으로 바위 치기.’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큰 힘과 맞서는 보통 사람의 도전을 우린 흔히 이렇게 부른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정치 역정이 그랬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것이 그렇고, 강고한 지역주의 정치와 싸워온 것이 더욱 그렇다. 돈 조직 계보가 곧바로 힘을 의미하고, 정경유착이 당연시되는 한국식 정치풍토에 줄기차게 맞선 것도 마찬가지다. ‘대세(大勢)’에 맞서며 그가 내세운 무기는 ‘상식과 원칙을 지키겠다’는 ‘고집’뿐이었다.

그는 4월27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후보가 당에 돈 한푼 낸 게 없다”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재벌이 아닌, 국민에게 빚진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기성 정치인들은 그의 무모한 도전을 ‘너무 튄다’거나 ‘이단아’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에 목말라 하던 국민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2000년 총선 때 부산에서 세번째 패배한 뒤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결성됐고, 이번 대선에서 20만 명의 자발적 지지자가 푼돈을 모아 70억원이 넘는 선거 자금을 보태준 것도 그만이 걸어온 ‘정치역정’에 대한 보답이었다.

노 후보는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천자문을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가난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중학교 1학년 때 3·15 부정선거 직전 선생님이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 숙제를 내주자 반장이었던 그는 “이거 선거운동이다. 전부 쓰지 말자”며 백지 동맹을 선동했다. 그 자신은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란 제목과 이름만 써냈다. ‘대통령’이라고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에게 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달래곤 했다.

가세가 더욱 기울자 그는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부산상고에 진학했고 우울한 사춘기가 이어졌다.

그를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신분 상승의 욕구까지 채워준 것은 75년의 사법시험 합격이었다. 고교졸업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가 법조인의 꿈을 키운 것은 부산대 법대 출신인 큰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81년 부림 사건(부산지역 재야운동권 20여명이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시국사건) 변론을 맡기 전까지 그는 그저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는 57일간 구금당하면서 구타와 고문으로 겁에 질린 한 대학생의 눈과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떴고, “앞으로는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30대 중반의 변호사가 뒤늦게 ‘의식화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인권 변호사’를 거쳐 ‘민주 투사’로 변모해 갔다. 87년 6월 항쟁 때는 ‘부산의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각종 시위에 앞장섰다.

87년 2월7일 ‘고 박종철(朴鍾哲)군 추모회’에 참석한 뒤 연좌농성을 벌인 혐의로 청구된 구속영장이 3번이나 모두 기각되고, 같은 해 9월 대우조선 노사 분규 개입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면서 ‘노무현’이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88년 13대 총선에서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누르고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한뒤 5공 비리 청문회에서 국민의 답답한 속을 풀어주는 매서운 질문으로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순탄할 것 같았던 그의 정치 행로는 90년 3당 합당 거부로 YS와 결별하고, 95년엔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한 DJ와도 이별하면서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그후 지역주의 장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낙선(落選)했지만 시련은 오히려 그에게 큰 정치를 준비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93년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현 자치경영연구원)는 그의 분권화와 지방화 구상을 마련하는 토대가 됐다. ‘행정수도 이전구성’도 그곳에서 싹이 텄다.

97년 11월 그는 “정치개혁도, 세대교체도, 지역감정부터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당선을 도우면서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는 햇볕정책 등 DJ의 개혁 노선을 상당부분 승계하면서 YS의 승부사적 기질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많아 “머리는 DJ, 가슴은 YS를 닮았다”(문희상·文喜相 민주당 최고위원)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대패로 ‘중도 낙마’의 위기에 몰렸을 때 ‘재경선’ ‘후보 단일화’ 같은 잇단 승부수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지면 깨끗이 물러난다’는 승부수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 경선 때 장인의 부역 문제로 공격받자 “대통령 되겠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는가. 그 때문에 대통령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겠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대해선 ‘감성(感性) 정치만 한다’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이다’는 반대세력의 비판도 따라다닌다.

▼노무현 당선자 주요 어록▼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찾아가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대통령이 되겠다(2002년 4월27일, 민주당 국민참여 경선에 의해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후보수락 연설문을 통해 청와대 담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며).

▽저는 예선에서의 승리도 중요하고 본선에서의 승리도 또한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유지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신뢰를 깨뜨리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2002년11월22일,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 방식에 합의한 뒤 불리한 조건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를 묻자 ‘원칙과 신뢰’가 중요하다며).

▽나는 반미감정도 없고 그렇다고 굽실굽실할 생각도 없다(2002년 11월22일,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 TV토론에서 정 대표가 “노 후보는 대통령이 돼도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도 미국에 가서 좋든 싫든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재벌개혁을 한다고 해서 대기업을 해코지하자는 게 아니다. 재벌개혁을 해야 대기업이 건강해지므로 재벌개혁은 대기업을 위한 것이다(2002년 12월10일, 대선후보 경제분야 TV합동토론에서 재벌개혁 없이는 한국경제의 장기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중산층과 서민들은 설 땅이 없게 된다며).

▽행정수도는 충청도로 이전하겠다. 돈이 많이 든다는데, 여러번 계산해도 그렇지 않다. 백번 양보해 좀 들더라도 꼭 돼야 한다. 충청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꼭 옮겨야 한다. 서울을 위해서도 꼭 옮겨야 한다(2002년 12월12일, 충북 충주지역 거리유세에서 행정수도 건설에 40조원이 든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을 반박한 뒤 행정수도 이전은 수도권과 지방을 동시에 살리는 ‘윈윈전략’이라며).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북한 핵포기와 경제협력, 경제제재 철회, 체제보장을 일괄 타결해야 한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발씩 양보하도록 촉구하겠다(2002년12월15일, 북핵 문제 해법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대화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며).

▼노무현당선자 연표▼

△1946년

경남 진영 출생(8월6일)

△1959년

진영읍 대창초등학교 졸업

△1963년

진영중학교 졸업

△1966년

부산상고 졸업

△1971년

육군상병만기제대(을지부대)

△1973년

권양숙 여사와 결혼

△1975년 4월

17회 사법고시 합격

△1977년 9월

대전지법 판사

△1978년 5월

변호사 개업

△1981년

부림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 시작△1984년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6월 민주항쟁 주도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부산 동구)

5공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청문회 스타로 부상)

국회 노동위원회 간사,

민주당 노동정책연구소장

△19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3당 합당 거부,

민주당 창당 주도

△1990년 7월

민자당의 방송관계법,

국군조직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항의해이해찬

김정길, 이철 의원과 함께 의원직

사퇴서 제출

△1991년

신민당 민주당 야권통합 협상 대표

통합민주당 민생위원장, 대변인, 예결위원, 당무위원

△1992년

14대 총선 낙선

(통합민주당·부산 동구)

조선일보 보도 관련 소송에서 승소

14대 대선 청년특위위원장, 물결유세단 단장

△1993년 3월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1993년 10월 사단법인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

△1995년 6월

통합민주당 부총재,

부산시장 선거 낙선

△1996년 4월

15대 총선 낙선

(통합민주당·서울 종로)

△1997년 11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 당선

(새정치국민회의),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2000년 4월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위원장, 16대 총선 낙선

△2000년 8월

해양수산부장관(∼2001년 3월)

△2001년 4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1년 9월6일 부산후원회에서 대권 도전 선언

△2001년 10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2년 4월27일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

의해 대통령후보로 선출

△2002년 6월13일 지방선거 참패

△2002년 8월8일 재·보궐 선거 참패

△2002년 9월30일 중앙선대위 출범

△2002년 11월15일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 후보단일화 합의

△2002년 11월25일 단일후보 확정

△2002년 11월27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등록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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