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금강산 상봉]첫째날 이모저모

  • 입력 2002년 4월 28일 18시 25분


남측의 변정의씨(왼쪽에서 두번째)와 북측 가족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며 박수를 치고 있다.
남측의 변정의씨(왼쪽에서 두번째)와 북측 가족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며 박수를 치고 있다.
28일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 금강산여관은 잠시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으나 이내 여기저기에서 반세기 동안 이산의 한을 풀어내는 오열이 터져나왔다. 깊이 파인 주름만큼 쌓여온 갖가지 사연과 가족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주고받기에는 2시간의 상봉시간은 짧았다.

○…“경필, 형필, 철규, 홍규 네 사람이 같이 보아라. 소식도 못 듣고 만나지 못한 채 5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구나.”

여송죽씨(78·서울 동작구 사당동)는 북의 시동생 경필씨가 남편(허창극·80)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경필씨가 편지를 다 읽자 여씨는 “내가 올 자리가 아닌데…”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남편 대신 자신이 온 사정을 설명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 때 부부가 각각 신청하면 기회가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해서 따로 했는데, 추첨 결과 남편은 떨어지고 여씨만 붙은 것이었다. 여씨가 “남편은 ‘나 대신 동생 얼굴 많이 보고 와서 자세히 전달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하자 경필씨는 눈자위를 붉혔다.

○…“미안하오. 모두 내 잘못이오. 하지만 지난 세월은 모두 묻어둡시다….”

6·25전쟁 때 피란 내려와 가족과 생이별을 한 길영진씨(81)는 아내 이영희씨(75)와 아들 창근씨를 만났지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헤어져 아들만을 바라보며 수절해온 아내의 손에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했다. 아내는 “창근이에게 색시도 있고 애도 있어요”라며 오히려 남편을 위로했다.

길씨는 6·25전쟁 당시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평양 집을 떠나 고향인 평북 선천으로 향한 직후 미처 아내를 만나지 못한 채 부친과 함께 화물차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 길씨는 이후 남한에서 재혼했지만, 남쪽 부인은 6년 전 세상을 떠났다.

○…67년 납북된 남편과의 상봉을 신청했지만 남편은 못 만나고 덕실(67) 순실씨(58) 등 여동생들만 만난 김애란씨(79)는 동생들이 북한체제 옹호 발언을 하자 “왜 자꾸 조작된 말을 하느냐”고 반박했다.

○…북측 가족들은 과거 상봉 때와 마찬가지로 TV 카메라와 기자들을 상당히 의식하는 눈치였다. 북측 상봉자 대부분은 기자들이 다가갈 때마다 “장군님(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지칭) 덕에 이렇게 만났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한 북측 상봉자는 “우리 장군님께 감사의 말을 하자”고 남측 가족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형수 변유실씨(69)와 조카 3명을 만난 류재춘씨(64·전남 장성군 삼서면)는 잘 포장한 쌀 두 되를 건넸다. 류씨는 “14세 위인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 제사에 쓰라고 직접 농사지은 쌀을 준비했다”며 “비록 지하에 계시지만 아우의 정성이 깃든 쌀로 제삿밥을 받으시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안용관씨(81)는 50여년 동안 수절하며 자신을 기다려온 북한의 아내 윤음전씨(74)와 딸 순복씨(51)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눈시울을 적셨다. 특히 운신을 못하는 아들 시복씨(51)는 이날 상봉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안씨는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시복씨와 순복씨를 부모님께 맡긴 채 서해 앞바다의 수니도로 아내 윤씨와 함께 피란했다가 인민군이 섬에 들이닥치자 혼자 월남해 반세기 동안 생이별을 겪었다.

안씨는 망설이다가 재혼한 남쪽 아내가 준비한 은색 한복을 윤씨에게 건네며 “새 가족이 준비했다”고 말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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