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둔 재계 고민]"보험금 어느 후보에 얼마나…"

  • 입력 2002년 1월 20일 18시 00분


얼마 전 재계에서는 은밀한 소문 하나가 떠돌았다. 정치권의 한 유력한 대선예비주자 측이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에게 회동을 요청했으나, 해당 재벌 측은 숙고 끝에 ‘총수가 신병치료차 출국할 예정’이라는 핑계를 대고 면담을 거절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이 재벌 총수는 최근 해외로 출국했고, 때가 때인지라 재계와 정치권에서는 소문의 진위(眞僞)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모 재벌그룹 관계자는 “소문의 내용을 확인하긴 어렵겠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비슷한 제의를 받을 경우 대부분의 재벌그룹들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회동 제의를 받았다는 재벌총수의 반응이 다른 그룹에도 전범(典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분위기〓97년 대선까지만 해도 여야 후보들의 선거자금은 대부분 재계의 후원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정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재벌개혁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회계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거액의 뭉칫돈 조성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민주당 대선예비주자의 참모는 최근 친분이 있는 A기업 자금담당 관계자를 만나 저녁을 함께 하면서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보험 좀 들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운을 뗐다. 그러나 자금담당 관계자는 즉각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대신 회계까지도 책임지라”고 맞받아 분위기가 머쓱해졌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제정된 부패방지기본법도 비자금의 거래를 크게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5000만원 이상 현금인출시 반드시 사유를 적시토록 한 조항 때문에 ‘거액 현금 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 재벌기업 임원은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들통날 경우 처벌은 처벌대로 받고, 주주들이 제기하는 각종 소송에 시달려야 할 상황”이라며 “돈을 주더라도 총수가 직접 나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 이번 대선에선 과거 3김(金)씨처럼 ‘뒤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후보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기업들이 더욱 몸을 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래도 고민은 있다〓그렇다고 정치권에 대해 ‘입을 싹 씻을 수도 없다’는 것이 재계의 고민이다.

따라서 아직은 대선구도가 명확해지지 않아 ‘달라는 쪽’이나 ‘줘야 할 쪽’이나 모두 조심하고 있지만, 판도가 드러나는 금년 하반기부터는 정치권과 재계 인사들의 은밀한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97년 대선후보 진영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후보의 개인 지지도가 뜨자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며 “그들이 주겠다는 돈을 모두 받았다면 아마 기백억원은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 정권 집권 초기 ‘마음고생’을 했던 한 재벌그룹은 최근 97년 대선 때를 거울삼아 ‘2002, 대선 전략 프로젝트’ 기획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그룹이 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대목은 당선자 예측과 함께 정치자금을 얼마나, 어떻게 제공할 것이냐는 데 모아져 있다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전했다. 그는 “후원금의 액수도 예년 대선 때에 비해 크게 줄 것이 분명하지만 과거 10 대 1의 비율이었던 여야 후보에 대한 보험금도 이제는 공평하게 배분될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양대 예종석(芮鍾碩) 교수는 “대우 현대가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재계인사들도 정치에 줄대는 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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