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징용-징병자 자료 방치 밝혀낸 정무호씨]"도대체 정부는"

  • 입력 2001년 12월 6일 18시 36분


'이분이 내 어버지'
'이분이 내 어버지'
“정부가 보관 중인 일제 하 징용·징병자 관련 기록을 제게 넘겨주면 사재를 털어서라도 자료를 정리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망일시와 장소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 하인 42년 일본군에 끌려간 부친의 사망날짜와 장소를 각고의 노력 끝에 알게 된 ㈜가산 대표 정무호(鄭武鎬·60)씨. 그는 정부가 71년 관련기록을 넘겨받았을 때 제대로 알려주기만 했어도 30년이나 엉뚱한 날에 제사를 올리는 불효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부친의 사망시기와 장소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 유복자인 정씨는 자신이 더 늙기 전에 부친의 사망일이라도 정확하게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92년 태평양전쟁유족회에 가입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부친과 함께 징병됐던 김상한씨(81)를 지난해 4월5일 경북 안동에서 만나면서 추적의 실마리가 풀렸다.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 보병78연대 8중대 3소대’ 소속이었다는 정보를 얻은 것.

이어 사망날짜를 확인하는 일에 나섰다. 외교통상부에 근무하는 친척을 통해 주일한국대사관에 문의했으며 다시 일본 외무성, 일본 후생성을 통해 확인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일본 후생성은 ‘관련 자료를 이미 한국 정부에 넘겼으니 한국에서 확인해보고 그래도 확인되지 않으면 다시 연락해달라’는 기막힌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설마 정부가 일본에서 받은 자료를 창고 속에 그냥 놔두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며 흥분했다.

정씨는 지난해 6월21일 정부기록보존소 서울사무소에서 부친이 44년 7월 2일 사망한 사실과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사실을 알았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정씨의 부친을 비롯, 조선인 5725명으로 구성된 78연대 병력이 파푸아뉴기니섬에 43년 6월 상륙한 뒤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112명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국 청년이란 이유로 파푸아뉴기니 전선에 내몰린 사람 가운데 무려 98.9%가 이역만리에서 숨졌던 것이다.

정씨는 “자식이 아내의 몸 속에서 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남들끼리 벌인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숨진 아버지가 A급 전범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정부가 지금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정씨는 그동안 부친 제삿날을 두 번 바꿨다. 전사통지가 따로 없어 ‘혹시나’ 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66년에 올린 첫 제삿날은 부친 생신인 음력 4월23일. 7년 뒤에는 부친의 입대일로 바꾸었다.

“정부는 이제라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희생자의 위패를 찾아와 별도의 추모 장소에 모시고 이들의 혼백을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무관심과 무성의로 일관해온 정부를 향한 정씨의 마지막 주문이다.

<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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