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오른 남북경협시대]‘베일’벗은 남북한 정보라인

  • 입력 2000년 9월 21일 14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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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두목(김용순 노동당비서)이 버젓이 왔다갔다한다.”(정창화 총무)

“간첩 잡으라는 기관의 총수(임동원 국가정보원장)가 간첩 총대장이 왔다갔다하는데 손을 놓고 있으니…비밀을 흘려줘도 알 수가 있어야지….”(목요상 정책위의장)

9월15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한나라당 3역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뿐 아니었다. “차제에 대북 업무 담당 정부인사들의 자질과 역할을 전반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김기배 사무총장)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경남대 총장 시절에 486컴퓨터 100대를 북한에 보냈다. 이런 인물이 장관을 맡고 있으니…”(권철현 대변인) 등 인신공격성 발언도 쏟아졌다.

권대변인은 또 일본의 한 시사주간지 기사를 인용해 “임동원 국정원장의 가족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이 대북협상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며 공세를 취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은 방한중인 김용순 비서가 청와대를 예방해 김대중 대통령과 접견한 9월14일 논평을 내고 김비서의 협상 상대역인 임원장의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권대변인이 인용한 기사는 한달 전 일본의 국제문제 전문 격주간지 ‘사피오’(SAPIO)지에 실린 것이다. 국정원 일각에서는 국정원과 임원장을 비판한 이 특집기사에 대한 대응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많아 ‘대응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바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기사의 내용이 전부 사실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이 인용한 대로 ‘임원장의 가족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임원장이 90년 10월 남북고위급회담 2차회담 대표로 평양에 갔을 때 누이를 만난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공지의 사실’이다. 그 당시 임대표의 가족상봉을 알선했던 북측 지도원이 바로 이번 정상회담 예비회담 때 북한측 단장으로 나온 김영성 최고인민회의 참사다. 이 때문에 국정원도 북한측의 진의 파악에 나서는 등 한때 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이 이런 ‘인연’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조짐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이 외국 언론 보도를 인용해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임원장의 국정원장직 사퇴를 주장한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경의선 복원 기공식 참석을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또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남북한 공동입장에 대해서도 성명 하나 내지 않았다.

임동원-김용순 ‘간접적인 남북 정상회담’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방한한 북한 노동당의 김용순 비서는 북한 노동당의 대남부문(통일전선사업)을 총괄하는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과 통전부 산하 외곽단체로서 대외-대남 교류협력 창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통전부는 아태 말고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위원장 공석)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위원장 김영대)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회장 정운업) 조국통일연구원(조통련·원장 이종혁) 등을 산하 외곽단체로 거느리고 있다. 이 밖에 재일 조선총련 등 해외교포 단체를 관장하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위원장 한시해)도 사실상 통전부의 지휘를 받고 있다.

따라서 이런 기구를 관장하는 김용순 비서의 직책에 걸맞은 상대역은 우리 제도로서는 임동원 국정원장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 표현대로라면 ‘간첩 두목’이 왔으니 ‘간첩 잡는 기관의 총수’가 상대하는 것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북 상호주의에도 부합하는 셈이라고나 할까. 임동원 국정원장의 ‘신분 노출’의 불가피성은 임원장이 ‘대통령특보’ 자격으로 참여한 평양 정상회담 직후에 열린 국회 정보위에서 한나라당측 정보위원들도 양해한 사안이다.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던 세종연구소 이종석 연구위원에 따르면, 대통령특보로 위장은 했지만 임동원 국정원장의 전면 등장은 오히려 북한측에 더 부담스런 존재였다. 북한 당국은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시절부터 줄기차게 ‘해체’를 주장해왔다.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국정원 해체는 그동안 북한이 내건 ‘북남대화의 3대 전제조건’이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이 3대 전제조건을 사실상 ‘없던 일’로 해버렸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주둔 필요성을 인정했으며(그 진의가 무엇인지 아직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방북한 언론사 대표단에게 노동당 규약 개정 의사를 밝히면서 “국가보안법은 남조선 법이고,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며 현실을 수긍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서 대통령특보로 ‘은둔’한 임원장을 큰소리로 “임동원 국정원장”이라고 불러 ‘해방’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은둔에서 해방’된 것은 우리측(임동원 국정원장)만이 아니었다. 북한 연구자인 이종석 연구위원이 정상회담 현장에서 ‘대남전략의 수정’을 직감할 수 있었던 상징적 사건은 임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의 등장이었다. 그동안 중요한 남북회담마다 빠짐없이 참석해 북측 대표단을 통제하던 ‘막후실세’로서 직책이 조평통 부위원장으로 알려졌던 림춘길이라는 인물이 가명을 벗고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 처음 본명으로 등장한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72년 남북 적십자회담 당시 ‘기자’로 남북회담에 처음 참여하기 시작한 림춘길은 85년 적십자 회담 때는 ‘자문위원’으로, 90년대 남북 고위급회담 때는 ‘수행원’으로 참여했지만 사실상 대표단을 통제하고 회담전략을 지휘한 ‘막후실세’였다(물론 우리측도 남북 적십자회담 초기에는 중정-안기부 직원들이 적십자 직원으로 위장해 회담에 참여했다). 그가 바로 대남사업을 총괄기획하는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옥과 동일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국정원은 그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상회담 전에 회담의 형식과 내용을 사전조율하기 위해 평양을 비밀방북한 임동원 국정원장-김보현 대북전략국장(현 3차장)을 맞이한 ‘카운터파트’도 김용순 통전부장-임동옥 제1부부장이었다.

이번 정상회담과 관련한 대북협상을 주도한 실무총책인 김보현 차장은 서영교 대북전략국장과 함께 정상회담 실현을 위한 대북 비밀접촉(싱가포르-상하이-베이징)의 주역이자 정상회담 전략 시나리오를 작성한 당사자들이다. 반면에 임동옥 부부장은 평양측 정상회담 전략 시나리오의 기획-연출자였다.

임부부장의 역할은 남북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역사적인 자리에 그가 동석한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지난 93년께부터 통전부 제1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용순 당중앙위 비서 겸 통전부장과 함께 부서 업무를 관장해왔다. 그는 강관주 현 대외연락부장과 함께 통전부 제1부부장으로 일해왔지만, 지난 97년 강씨가 대외연락부장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현재는 혼자서 이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통전부 제1부부장은 통상 두 명이 맡아왔다.

이번 김용순 비서의 방문길에는 임동옥 부부장 말고도 박성천 당중앙위 과장, 권호웅 당중앙위 지도원 등 대남사업의 핵심 실무라인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보니 남측에서도 임동원 원장을 필두로 김보현 3차장, 서영교 국장, 서훈 과장 등 국정원의 대북 협상라인이 통째로 동원됐다. 물론 이들은 서로 구면이지만 남과 북의 비선(秘線)조직이 이처럼 한꺼번에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에서 공개 대면한 것은 남북 정보기관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임동원-김용순의 ‘파트너십‘은 남북관계 전반을 이끄는 총사령탑임이 이미 정상회담에서 드러났고, 그동안 노출되지 않았던 김보현-임동옥 채널은 이번에 처음 드러났다. 역시 이번에 드러난 서훈 과장-권호웅 지도원은 ‘베이징 S 라인’이라는 암호명으로 중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서로 비공개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준비접촉을 포함한 각종 실무협상을 타결한 ‘손과 발’이었다. 서훈 과장은 정상회담 때도 ‘청와대 국장’의 직함으로 정상회담 전략수행원으로 평양에 가 우리측 평양 상황실을 지켰다. 한편 ‘아태 참사 권민’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권호웅 지도원도 이번 방문수행으로 북한의 대표적인 차세대 회담일꾼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대북 전문가들이 이번 김용순 비서의 방문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역시 임동옥 부부장의 전면 등장이다. 북한 중앙방송은 지난 6월15일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소식을 전하면서 이 자리에 임동옥 당 제1부부장이 동석했다고 밝혔다. 임동옥 제1부부장이 북한 언론에 보도된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그는 지금까지 대외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인물이다.

북한 대남사업 총괄 막후실세 임동옥

한때 ‘림춘길’의 상대역이었던 전 국정원 간부 K씨는 임동옥 부부장을 ‘김용순 비서에 버금가는 실력자’라고 단언했다. 직급은 김용순 비서가 더 높지만 업무에 관한 실권은 오히려 임동옥 부부장이 더 셀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통전부의 대남-대외사업 조직은 △총괄 임동옥 △대남 전금진(아태 부위원장) △대외 송호경(아태 부위원장) △교민 한시해(해포 위원장) 등으로 전담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통전부 간부들과 달리 외곽단체의 직함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그가 남북협상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거나,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김정일 위원장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는 풀이다.

대북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이번 김용순 특사의 방문에 박재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대장)을 동행시킨 점이다. 북측은 박재경 대장의 방문 목적이 ‘송이버섯 전달’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방문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가속도가 붙는 듯했던 남북관계가 긴장완화(군사) 문제로 멈칫하고 있는 시점에서 김위원장이 군부 내 최측근인 박대장을 ‘송이 전달 책임자’로 보낸 것은 남북 군사당국간 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송이 전달자로 군 수뇌부 인사를 선택한 김위원장의 의도에는 ‘평화의지의 과시’가 담겨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민군 핵심인사를 선물 전달자로 씀으로써 인민군이 ‘평화사업’에 봉사한다는 점을 과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는 김국방위원장이 평양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군인을 그냥 두면 주적(主敵) 개념만 생기니 빨리 평화적 건설사업에 투입해야 한다”고 말한 대목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사실 인민군 대장이 서울에 와 송이를 전달하며 요리법까지 설명하는 장면은 한편의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는 북한 군부 최고 실세인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이 지난 6월15일 정상회담 환송오찬에 사복으로 참석해 김대통령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처럼이나 아이러니컬한 것이었다. 이날은 바로 지난해 6월 북한 해군이 서해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에 완패한 치욕을 당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평해전 1주년을 앞두고 ‘천백배의 보복’을 호언하며 서해통항질서까지 발표했던 북한군이 바로 그 1주년이 되는 날에 열린 긴급 국방위원회에서 ‘대남비방 중단’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김위원장이 지난 8월 언론사 방북대표단과의 대화에서 “당 간부들이 고정된 틀 속에서 잘 변화하지 않으려 한다”며 불만을 토로한 데서 보듯 북한에도 급격한 변화를 반대하는 기득권층이 존재함을 짐작할 수 있다. 군부가 그 대표적 세력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인 김용순 비서도 “군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군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군부가 결정한다’는 북한 체제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은 최근 국방장관회담을 앞두고 인민무력성의 이름을 인민무력부로 바꾸고 그 산하에 있던 총정치국을 인민무력부와 동격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등 군사직제를 개편했다. 이는 남북관계의 급격한 변화로 군사력 강화의 명분과 필요성이 약해진 데 따른 북한 내부의 일부 우려를 불식시키고 나아가 군을 더욱 강화한다는 의지를 명백히 보여준 조치로 풀이할 수 있다. 북한은 9월1일 군사조직개편을 단행해 인민무력부 산하에 있던 총정치국을 격상해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밑에 나란히 앉도록 했다.

이처럼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의 위상을 강화하는 가운데 제주도 국방장관회담을 전격 수용하고 음지에서 대남협상을 지휘통제하던 통전부 라인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대남전략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그만큼 남북관계에서 풀어야 할 ‘고리’가 많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따라서 대북 전문가들은 김용순 통전부장과 임동옥 제1부부장의 등장과 함께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남북 정보기관의 ‘대북-대남사업’의 핵심 라인업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양측 모두 돌아설 수 없는 ‘배수진’을 쳤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9월11일 서울에 온 김용순 비서는 함께 온 임동옥 부부장을 서로 빤히 잘 아는 임동원 원장과 김보현 차장에게 ‘소개’하는, ‘간첩 두목’들이 전면에 노출되는 남북 첩보사에 유례없는 역사적 현장에서 의미심장한 농담을 던졌다.

“동업자끼리 만났으니 잘해봅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전문에서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고 선언하고 있다. 굳이 토를 달자면 이처럼 남북한의 특수관계(민족 내부관계)와 상황의 이중성이 정보기관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뜨리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 당 주간동아 기자>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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