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원대 1만원 舊券'괴자금說 떠돈다

  • 입력 2000년 3월 29일 20시 23분


총선을 앞두고 명동 사채시장 일대에 실체가 분명치 않은 ‘수백억원대의 1만원권 구권(舊券) 괴자금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권(新券)으로 교환하려는 거액의 1만원권 구권이 시중에 흘러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졌으며 최근 장영자씨가 연루된 구권교환사기 사건이 노출되면서 더 그럴듯하게 유포되고 있다.

특히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뭉칫돈’이 정치자금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나도는 등 돈의 출처와 주인을 놓고 소문이 무성하다.

서울 명동 사채 중개 사무실들과 한국은행에는 지난해 9월부터 “수백억원의 1만원권 구권이 있는데 신권으로 교환할 수 있느냐” “은행에서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주느냐”는 문의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채중개업을 하는 O씨는 “지난달 ‘1만원권 구권 100억원이 있는데 신권으로 바꿔 주면 10%의 커미션을 주겠다’는 사람을 사무실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다”며 “돈을 보자고 했더니 ‘돈은 나중에 보여줄테니 당신의 통장 잔액부터 먼저 보여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O씨는 “문의자가 사기꾼인 것 같아 실제 거래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채업자 J씨도 2주일 전 O씨와 똑같은 문의를 받았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바꾸려는 구권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돈으로 발권 때처럼 30억원 단위의 묶음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J씨 역시 “돈을 먼저 보여달라고 하자 문의자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한 뒤 연락이 끊겨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이철성(李哲成)발권정책팀장 역시 “지난해 9월부터 신분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옛날 만원짜리를 갖고 있는데 은행에서 신권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전화 문의가 계속 오고 있다”며 “그러나 아직 거액의 구권이 은행에 입금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 교환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사채시장에 “구권을 사게 해 달라”는 매수 문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검찰에 적발된 ‘장영자 사기’와 같은 구권 관련 사기 사건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사채 중개업자들은 이번 1만원권 구권에 관한 괴소문이 과거 사채시장에서 자주 있던 고위층 빙자 국채(國債)사기 사건 등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한국은행에 회수되지 않은 1만원권 구권이 엄청난 규모인데다 구여권 실세들이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다는 설(說)이 파다해 사채시장에선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전주(錢主)가 여러 명의 중개인을 거쳐 거래하는 사채시장의 특성상 실제 구권의 규모는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사정 당국도 1만원권 구권의 실체에 대해선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특히 교환 문의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 16대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사정 당국은 “이번 총선에서 역대 어느 선거보다 많은 돈이 쏟아질 것으로 예견돼 후보들마다 거액의 돈이 절실하기 때문에 그동안 감춰졌던 정치권 주변의 검은돈이 시중으로 흘러 나올 개연성이 높다”며 “소문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시중에서 정상적으로 예치와 유통이 가능한 구권을 굳이 신권으로 바꾸려는 이유와 구권 소유주가 신권으로 교환하기 위해 선뜻 은행에 가지 못하고 사채시장을 찾는 이유 또한 구권이 정치권 주변의 비자금일 개연성을 높여 주는 대목.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는 비자금은 통상 시중은행에서 보유중인 것보다 훨씬 많은 뭉칫돈이기 때문에 한국은행에서 당일 발권한 화폐가 사용되는 일이 많다. 또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가 실명제 실시 직전 인출한 비자금일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

문제는 두 경우 모두 화폐에 찍힌 일련번호가 순서대로 돼 있어 은행을 통해 거액의 구권이 교환될 경우 회수된 구권의 일련번호만 확인하면 언제 어느 은행에서 누구에게 인출됐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

결국 이같은 말못할 사연 때문에 돈의 출처를 숨길 수밖에 없고 사기범들도 이런 약점을 노렸을 것으로 사정 당국과 사채업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이현두·박현진기자>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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