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당시 他기관들 『재경원이 할 일』위기 방관

  • 입력 1999년 1월 27일 19시 07분


경제청문회의 증인 및 참고인 신문을 통해 97년 당시 경제정책 결정시스템의 근본적 허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표적인 문제는 재정경제원에 대한 지나친 의존 체제였다. 재경원은 94년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쳐 만든 ‘공룡기구’.

자연히 재경원이 경제정책 운용의 절대적 권한과 책임을 짊어지게 돼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다른 기관들은 사태를 방관하기만 했다. 외환시장 사정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던 한국은행도 그랬다.

이경식(李經植)전한은총재는 “외환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게 직접 별도 대책을 건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경원장관인 강경식(姜慶植)전경제부총리의 소관업무이기 때문이라는 해명이었다.

결국 이전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행 결정이 내려지기 하루 전인 97년 11월12일 김전대통령의 전화를 받고서야 “이러다가 국가부도사태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인호(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전대통령에게 하루에도 몇번씩 보고를 했지만 IMF로 가야한다는 보고는 강전부총리가 했을 것으로 판단해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97년 당시 경제부총리 1인의 개인적 판단에 한국 경제의 모든 운명이 걸려 있었던 셈이다. 자민련 어준선(魚浚善)의원은 “특히 김전대통령이 경제 현안에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편중현상이 더욱 심했다”고 지적했다.

실무진의 건의가 제대로 수용되지 않은 점도 중요 문제로 지적됐다.

한은은 97년 3월27일 ‘최근의 경제상황과 정책대응방향’보고서를 통해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했었다. 또 10월27일에도 ‘최근의 외환사정과 대응방안’보고서를 통해 IMF행을 건의했지만 재경원에 의해 모두 묵살됐다.

재경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제의가 있었다.윤증현(尹增鉉)전금융정책실장은 97년 1월 환율절하를 청와대에 건의했으나 당시 이석채(李錫采)경제수석은 “환율의 ‘환’자도 꺼내지 말라”며 입을 막았다. 김석동(金錫東)자금과장도 외환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김인호전수석도 윤진식(尹鎭植)전조세금융비서관의 IMF행 건의를 귓전으로 흘렸다. 그는 의원들의 질책에 “수석비서관은 대책을 보고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댔다.

국민회의 김민석(金民錫)의원은 “모든 언론과 대다수 실무진이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는데도 한 두명에 의해 무시됐다”고 정책결정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송인수기자〉i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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