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시대/21세기 희망을 향하여]

  • 입력 1997년 12월 20일 20시 03분


경제현안 챙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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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민의 「21세기 선택」은 「김대중」이었다. 역년적(曆年的) 의미에서의 21세기 개막은 아직 3년이 남았지만 정치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1천년을 여는 제전(祭典)을 주재할 「제사장(祭司長)」으로 「김대중」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국가상황은 정의와 행복과 번영의 황금시대를 의미하는 천년제, 이른바 「밀레니엄(millennium)」의 의미를 앞당겨 음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김대중당선자의 월계관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에도 「기대」와 함께 「걱정」과 「착잡함」이 엇갈리는게 숨길수 없는 오늘의 각박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같은 오늘의 현실이 「김대중대통령」의 탄생이 함축하는 정치적, 정치사적 의미를 압도할 수는 없다. 그만큼 「김대중」의 승리가 지니는 의미는 심대(甚大)하다. 실로 반세기만에 선거에 의해 여야간에 정권이 교체된 것만으로도 「김대중」의 승리는 「민(民)의 승리」이자 지역감정, 색깔론 등 전근대적 질곡을 벗어난 「시대적 한계의 극복」으로 평가될 만하다. 김후보의 승리는 「DJT연합」, 여권의 지리멸렬한 분열상 등 여러가지 요인의 복합적 산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김대중」 승리의 의미가 그러한 선거전략의 산물에 국한될 수는 없다. 비록 40여년에 걸친 정치행로에서 갖가지 모진 풍상, 비운, 좌절을 겪었지만 「정치인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공동선에 대한 신념을 지킨 불굴의 투사」로 상징되고 더 널리 알려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 대선과정에서 김후보가 놀라운 굴신력(屈伸力)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당선자에게 무엇보다 「개혁에의 열망」이라는 기대가 앞서고 「김대중대통령」의 탄생에 어떤 접두수사(接頭修辭)가 붙든 「혁명」이라는 의미부여가 뒤따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김대중」의 정치행로와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김당선자를 기다리고 있는 화급한 과제는 되물을 필요조차 없이 자명하다. 「거품」을 「국력」으로 착각한 미망(迷妄)끝에 경제주권을 잃은 국가적 환난(患難)을 수습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일이다. 대선과정에서 스스로 공언했듯이 김당선자는 아마 당선증을 쥐자마자 우리 경제주권의 「관리자」들을 찾아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형편이 궁박하다해도 「21세기 한국호(韓國號)」의 새 선장이 될 김당선자에게 부여된 소명(召命)이 「미국행」 한가지로 상징되거나 집약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국가적 환부(患部)를 생각하면 그것은 더 이상의 출혈을 막는 「지혈제(止血劑)」에 불과하다. 김당선자에게 부과된 진정한 과제는 환부의 근원적 치유, 다시 말해 과감하게 새로운 국가운영의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환난을 오로지 「타율적 구조조정」이나 「달러」에 의존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더 큰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구조조정이 아닌 구조개혁을 「타율」이 아닌 「자율」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범위도 금융계나 기업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분야 등을 망라하는 「총체적 개혁」, 어느 의미에선 「혁명적 개혁」이 요구되는 게 오늘의 상황이다. 바로 이 과업이 김당선자가 앞장서서 이루어내야 할 소명의 요체다. 우리 사회를 규율하는 내재적 중심가치를 김당선자가 긴 세월 동안 추구하고 주장한 진정한 민주성 공정성 합리성 건강성으로 바로 세우지 못하는 한 나라의 환난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물론, 경제주권을 회복해 국제사회에서 민족자존과 정체성을 되찾을 길도 없다. 그리고 김당선자의 운명도 임기말에 「국적(國敵)」의 소리까지 듣게 된 김영삼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문제는 이 모두 「보통대통령」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개척되고 창조돼야 할 지난(至難)한 과제라는 사실이다. 짧게는 50년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귀감이 될 만한 전임자들의 업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독재, 정변, 군부세력의 전단(專斷), 무능과 무책임으로 시종한 이른바 문민정권의 방종으로 점철된 반세기 과거사와의 결별없이 어떤 정치구호도 또다른 환난을 부를 뿐이다. 대선 4수(修)라는 약점과 「3김 청산」과 「세대 교체」의 열풍 속에서도 민의 선택이 「김대중」으로 귀결된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소명을 살신(殺身)의 의지로 수행하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당선자의 전도(前途)는 한없이 험난하다. 당위나 소명을 자임하겠다는 「의욕」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당선자 스스로 거듭 「자만」에 빠지지 말고 「자기쇄신」의 의지를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반대한 「과반의 민의」를 되살펴보는 일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반 DJ」를 외친 반대자의 주장과 우려는 물론 이른바 「정서」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력」으로 국난 극복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져야 한다. 이 대목에 관한 한 보복과 반목, 배신과 편가르기의 저열한 정치로 나라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난파의 수렁에 몰아넣은 전임자 김영삼대통령이야말로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이같은 마음가짐과 함께 김당선자가 서둘러야 할 첫 과제는 밝은 눈과 넓은 시야로 국정운영의 틀을 새롭게 창출할 「사람들」을 찾는 일이다. 이미 대선과정에서 여러가지 좋은 원칙을 국민앞에 밝혔지만 과거처럼 「말 따로, 행동 따로」 식으로 전단할 상황이 아니다. 눈높이가 선거운동에서의 기여에 둔 「논공(論功)」이나 「측근중용」 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거역해서는 안될 국력결집과 사회통합의 소명은 한낱 공허한 말장난에 그칠 뿐이다. 「거국체제」든 다른 형태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더이상 유보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공인으로서의 도덕성, 21세기 정보 지식 서비스 산업사회에의 적응력과 실용성 등의 덕목을 갖춘 문자 그대로 「구국의 결사대」를 조직하겠다는 심정이 선행돼야 한다. 대선전의 정파간 지분이나 입도선매(立稻先賣)식 안배 등을 생각할 만큼 우리의 처지는 한가롭지 못하다. 난국 극복을 위한 에너지와 열정의 확보는 새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신뢰없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신뢰확보를 위한 첫 가시적 조치가 당선자의 첫 「인사」임은 물론이다.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눈앞의 과제인 총체적 구조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때 「김대중대통령」은 비로소 통일의 바탕을 마련한 새 천년제의 영광스런 제사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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