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색깔시비」에 주눅들지 말자』

  • 입력 1997년 8월 22일 20시 08분


22일 국민회의는 金大中(김대중)총재의 「색깔시비」에 「일제공격―전면수비」에 들어갔다. 김총재에 대한 「용공음해」를 주도하고 있다고 지목해온 신한국당의 姜三載(강삼재)사무총장 등 3명에 대한 고소고발을 강행한 것은 「일제공격」. 김총재의 한국전쟁 당시 「병역문제」와 「용공전력시비」에 대한 관련자들의 증언을 공개한 것은 「전면수비」인 셈이다. 사실 국민회의 일각에서는 吳益濟(오익제)씨 월북사건 이후 계속된 김총재의 「색깔시비」에 대응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쟁점화되는 것 자체가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22일을 고비로 이같은 분위기는 반전됐다. 우선 국민회의는 「야당 용공음해 대책위원회」의 千容宅(천용택)의원을 동원, A4용지 50장 분량의 「김대중총재 6.25전후 군경력 및 사상 관련 사실 규명자료」를 제시하며 반박에 나섰다. 「신한국당은 김총재가 6.25당시 공비토벌에 참여했던 해상방위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음해했으나 당시 목포경비부 사령관을 지낸 宋寅明(송인명·77·예비역 해병준장)전장군을 뉴욕에서 만나 사실임을 확인했다」는 게 요지. 천의원은 송전장군이 미국 뉴욕에 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지난 14일 뉴욕으로 가 이같은 증언을 녹취했다고 밝혔다. 천의원은 이어 3공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金聖恩(김성은)씨의 증언도 공개했다. 「김대중씨가 해방전후 우익활동을 했다」는 게 김씨의 증언. 지난 46년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창설임무를 띠고 목포에 부임한 김씨는 김총재의 장인인 차보륜씨(사별한 첫 부인의 아버지)가 제공한 집에서 지내다 김총재를 만났으며 김총재가 당시 청년단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증언했다는 것. 국민회의가 주공격대상을 삼은 것은 「김대중총재는 6.25전쟁 당시 미 해군 함상에서 다른 좌익분자들과 함께 처형당할 위기였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신한국당 李思哲(이사철)대변인의 주장. 주한미대사관이 사실무근이라는 보도자료까지 공개하자 김총재는 이날 간부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집권당이 아무리 다급했다지만 우방국까지 끌어들인 것은 몰상식하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김창혁·김재호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