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사람들 『안기부라면 치떨린다』

  • 입력 1997년 8월 21일 20시 32분


『안기부 때문에 혈압이 다시 떨어졌어…』 평소 저혈압을 조심해오던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는 21일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실장」 명의로 鄭東泳(정동영)대변인에게 수사협조공문이 날아들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라면 「악몽」부터 되살리는 동교동 인사들의 「한(恨)」을 보여주는 반응이다. 사실 金大中(김대중)총재가 세 번의 대선실패를 얘기하면서 『단 한 번도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유 중엔 안기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정계은퇴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92년 대선실패는 바로 선거직전 안기부가 발표한 「간첩李善實(이선실)사건」과 당시 金泳三(김영삼)후보진영의 용공음해 때문이었다는 게김총재 진영의 주장이다. 88년 徐敬元(서경원)전의원의 밀입북사건 때는 현직 야당총재가 안기부의 조사를 받는 「초유의 치욕」을 겪기도 했다. 당시 평민당 김총재는 서전의원으로부터 밀입북 사실을 전해듣고 金元基(김원기)원내총무에게 『朴世直(박세직)안기부장에게 즉각 통보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안기부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혐의를 적용, 조사강행의사를 밝혔고 결국 김총재는 서울중부경찰서에서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 불고지혐의나 「1만달러 수수설」은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동교동 사람들은 「잠깐 조사」가 「밤늦게까지」로 이어진 당시를 지금도 「악몽」처럼기억하고 있다. 국민회의가 작년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 개정사태 때 특히 안기부의 수사권부활문제에 「당운(黨運)」을 걸다시피하고 결사반대한 데는 어쩌면 명분과 실리를 넘어 그런저런 「안기부 콤플렉스」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그 뿌리는 70년대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교동 사람들은 오늘날 김총재가 받고 있는 각종 「용공전력음해」는 70년대초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파일」을 만든 뒤 특히 일본의 언론인과 잡지 등을 동원, 「일본발 뉴스」로 국내에 역수입되도록 공작한 게 「원류(源流)」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유의 「일본발 용공음해」는 오늘도 집권여당 대변인의 입을 통해 유포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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