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 연변생활]2천여명 한국行 꿈안고 「은둔」

  • 입력 1996년 12월 7일 20시 11분


북한을 탈출, 일단 중국 땅을 밟은 탈북자들의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중국공안은 물론 북한이 파견한 체포조(특무원)와 북한국적의 조교(朝僑)들의 감시 눈초리로부터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땅을 전전하고 있는 탈북자들은 적게는 5백∼6백명에서 최대 2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 갈 꿈을 지닌 채 은신생활을 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여름철에는 공원이나 역대합실 등에서 노숙도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아 나선다. 탈북자들의 은신처는 농촌마을이나 도시의 조선족 식당 술집 등이 주로 이용된다. 특히 동북3성의 조선족 농촌은 젊은이들이 대도시나 한국으로 대거 떠나버려 노동력이 극히 부족해 탈북자들이 일을 도우면서 은신하기에 좋다.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탈북자들에게 적지않은 힘이 된다. 그러나 북한인과의 접촉은 사전 혹은 사후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국내법적 제약이 있는데다 무작정 보호해줄 수도 없어 대부분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친다. 또 일부는 한국인 선교조직의 보호를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하순 압록강을 건너 탈출한 북한 특수부대출신 김모씨(27)의 유랑비화는 탈북자들의 긴박한 생활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김씨는 『먹는 문제는 요령이 생겨 걱정이 없다』며 음식점에 들어가 배불리 먹고 도주하는 비결을 털어놓았다. 즉 화장실이 식당외부에 있는 음식점을 찾아가 배불리 먹은뒤 영어로 화장실을 물어보고는 밖으로 나와 슬쩍 사라져 버린다는 것. 김씨는 특수부대에서 배운 영어 몇마디를 이용해 외국인 행세를 하면 대부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콩으로 잠입할 결심인 김씨는 또 한국인이건 조선족이건 한번 만나 도움을 얻고나면 두번 다시 만나지 않으며 한번 갔던 장소 역시 절대로 다시 찾지 않는다고 밝혔다. 만의 하나 신고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다. 오빠와 함께 지난 3월 두만강을 넘어온 정모양(21)의 경우는 탈북자들의 서러운 처지를 절실하게 전해준다. 연변지역에 발을 디딘 정양 남매는 마침 조선족남자 박모씨(35)를 만나 용정(龍井)의 한 농촌마을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후 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노총각 아들을 둔 박씨의 어머니가 정양을 며느리로 삼기 위해 한국행을 꿈꾸던 오빠를 중국공안에 신고해버린 것. 정양으로 하여금 한국망명 꿈을 포기하고 함께 살도록 강요한 것은 물론이다. 수개월동안 억지로 새색시노릇을 한 정양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집을 뛰쳐나왔다. 현재 정양은 심양(瀋陽)의 어느 조선족가정에서 보모로 일하면서 한국에 가게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北京〓黃義鳳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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