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서 석동빈 기자가 만난]F1 국내개최 주역 정영조 KAV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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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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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소리까지 들으며 대회 유치… F1 굉음 기다려지네요”

《기대가 큰 만큼 말도 많았던 한국 포뮬러원(F1) 대회가 12일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전남 영암 서킷 승인으로 최종 확정됐다. 기자이기보다는 현역 레이서의 한 사람으로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코리아 F1 대회운영법인인 카보(KAVO)의 정영조 대표(49).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F1을 유치한 그였지만 한때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기자도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어떤 능력이 있기에 그 어렵다는 F1을 유치했을까.” 3월 정 대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미 국내 모터스포츠업계 인사들로부터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를 들은 터였다. 만나고 나서 오해가 조금 풀리긴 했다. 그래도 당시는 대회 개최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어떤 이유든 대회가 취소된다면 그는 사기꾼이 될 처지였다. 대회 개최가 최종 확정된 만큼 그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워낙 바빠서 약속을 잡을 수가 없단다. 13일 영암에서 잠시 올라온다는 답변을 듣고 무작정 서울 마포구 KAVO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두 번째 인터뷰인 만큼 한가한 얘기는 접어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 대표의 ‘과거’를 얘기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됐습니까(그로선 좀 황당하고 무례한 질문이겠지만 이미 사나이답게 다 털어놓기로 약속한 터였다).

“1987년 공군을 제대한 후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해외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싱가포르에 다녀오다 운명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코노미석을 탔는데 비행기 옆자리 승객이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스튜어디스에게 나도 달라고 했더니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에게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 옆에 있는 분은 기장인데 여행차 탑승해서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장이 미안했던지 내 슬리퍼도 달라고 부탁해서 덕분에 얻어 신었죠.”

―슬리퍼 하나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전남 영암 서킷 승인이 최종 확정된 12일 영암 서킷 관제실에서 정영조 KAVO 대표(오른쪽)와 찰리 화이팅 FIA 기술안전 책임자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KAVO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전남 영암 서킷 승인이 최종 확정된 12일 영암 서킷 관제실에서 정영조 KAVO 대표(오른쪽)와 찰리 화이팅 FIA 기술안전 책임자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KAVO
“네 그렇죠. 저는 공군 시절 파일럿은 아니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지만 당시로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기장이 해외에는 민간 항공학교가 여럿 있고 거기를 졸업하면 기장이 될 수 있다더군요. 여러 군데 지원서를 보냈는데 호주의 한 항공학교에서 오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단숨에 호주로 갔죠. 슬리퍼에서 발단이 됐으니 슬리퍼가 내 인생을 바꾼 셈이죠.”

―그런데 항공학교와 F1이 무슨 상관입니까.

“기자 양반 급하시긴. 내가 기계를 작동하는 데는 소질이 있었나 봅니다. 운전도 꽤 좋아했고요. 호주 멜버른 근처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ANAC라는 항공학교에서 9개월 만에 자가용과 상업용조종사 면허증을 땄죠. 하지만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는데 학교에서 나를 잘 봤는지 그곳 비행 강사로 취직하게 됐고 결국 학장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호주에서 1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우연히 F1의 운영권을 가지고 있는 F1매니지먼트(FOM)의 버니 에클레스톤 회장을 알게 됐죠. 그분도 자가용 비행기가 3대나 되고 헬기 조종을 즐겨요.”

―그래서 F1을 유치하게 된 겁니까.

“그건 또 다른 얘깁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해보려고 1995년쯤엔가 잠시 들어왔다가 지인의 부탁으로 강원 춘천에서 열린 자동차 랠리를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모터스포츠 쪽 사람들과 친해졌어요. 내가 사업 수완이 있어 보였는지 덜컥 한국자동차경주협회(KARA) 회장을 맡기는 겁니다. KARA는 FIA가 인증하는 기관이었고 그때부터 그저 알던 사이였던 에클레스톤 회장과 본격적인 친분을 쌓게 됐습니다.”

―자동차에 대해선 관심도 없다가 덜컥 KARA 회장을 받아들였다는 게 잘 이해가 안되는데요.

“노래 부르고 술 마시는 밤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 대신 어릴 때부터 차에 빠져들었습니다. 호주에서 돈이 약간 모이자 포드 머스탱과 닛산 스카이라인을 구입했고 뒤에는 포르셰까지 사들였어요. 지금은 호주 멜버른 집에 포르셰가 3대나 됩니다. 속도를 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한때 서울∼부산을 2시간 정도에 주파한 적이 있을 정도로 스피드광이기도 했죠. 9월 5일 영암 서킷 공개행사 때 ‘스피라’ 페이스카 운전도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과속을 했다는 건 신문에 안 쓰실 거죠?”

―에클레스톤 회장과의 친분만으로 F1을 유치하게 됐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겠죠. 처음엔 멋모르고 ‘한국에서 F1을 열고 싶다’고 에클레스톤 회장에게 말했죠. F3부터 해보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때부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 경남도에서 관심을 보여서 창원 F3가 열리게 된 겁니다.”

―하지만 창원 F3는 실패라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정영조 대표(왼쪽)가 F1 운영권을 갖고 있는 F1매니지먼트의 버니 에클레스톤 회장(오른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박준영 전남도지사. 사진 제공 KAVO
정영조 대표(왼쪽)가 F1 운영권을 갖고 있는 F1매니지먼트의 버니 에클레스톤 회장(오른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박준영 전남도지사. 사진 제공 KAVO
“(정색을 하며) 누가 그럽디까. 경기 자체만 놓고 보면 5년간 제법 수익을 남겼어요. 관중도 총 7만 명이 찾아왔고요. 지난해 F1에서 종합우승한 젠슨 버튼이 창원 F3 출신입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창원 F3 코스는 정말 무섭도록 짜릿했다’고 했는데, 얼마나 흐뭇하던지. 당시 모터스포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도지사가 바뀌면서 결국 5년 만에 막을 내리긴 했지만… 어쨌든 창원 F3는 실패가 아닙니다.”

―그럼 경남에서 F1이 열릴 수도 있었겠네요.

“사실 F1 개최를 목표로 F3를 연 것이니 틀린 추측은 아닐 겁니다. 경남에서 경기장 터까지 물색했으니까요. 다만 여러 가지 상황이 안 맞은 거죠. 에클레스톤 회장은 창원 F3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봤고, 한국의 경제도 성장했다고 판단해 2005년 한국 F1 개최권 계약서를 내게 준 거죠. 계약된 개최 기간은 기본 7년이고 상황에 따라 5년을 더 할 수 있는 추가 옵션입니다. 때마침 지역개발을 위한 아이템을 찾던 전남도와 이야기가 잘 진행돼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추진 과정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F1 특별법 통과의 그 험난한 과정을. 투자 유치와 경기장 공사도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정말 떠올리기도 싫습니다. 더 힘든 건 주변의 불신이었습니다. 아무리 F1을 유치했다고 설명해도 믿지 않더군요. 일부는 ‘사기꾼’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한국 땅에서 F1이 열리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F1 유치계약서는 비밀유지 협약이 돼 있어서 공개할 수가 없었거든요. 결국 비공개를 조건으로, 불신하는 몇 명에게 계약서를 보여줬지만 그래도 조작된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더군요. 정말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안 믿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에겐 뭘 보여줘도 안 믿는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F1까지 유치했는데도 국내 모터스포츠 업계에선 정 대표를 그리 썩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던데요. KARA가 레이싱팀과 선수들로부터 인증과 라이선스 발급 명목으로 돈을 챙기기만 했지 해준 게 없다는 불만도 나오더군요. 사실 저도 선수 라이선스를 발급받기 위해 KARA에 비용을 지불했는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먼저 모터스포츠인들에게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한국의 모터스포츠가 언제까지 국내에만 머물며 동네잔치로 만족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국제 공인경기도 치러야 하고 FIA가 인증하는 라이선스도 필요합니다. 그동안 한국 모터스포츠가 너무 우물 속에 앉아 작은 밥그릇을 두고 다투며 파이를 키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죠. 이번 F1이 계기가 돼서 우리 모터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뻗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성공적인 대회 마무리일 텐데요. 자신은 있습니까.

“경기장은 최신 시설로 지어놨으니 경기 운영에는 문제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공사가 늦어져 충분한 홍보와 마케팅을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모터스포츠 저변이 두껍지 않은 한국에서 단번에 흥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F1은 워낙 다이내믹한 승부여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스포츠라고 봅니다. 올해는 관람석이 모두 차지 않을지 모르지만 해가 거듭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첫술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난보다는 격려와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세요.”

―대회가 끝난 뒤에는 서킷의 활용도 걱정됩니다.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위험하게 거리를 질주하는 폭주족을 서킷으로 끌어들여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자동차 안전교육, 국제·국내 레이싱경기 개최 등으로 자동차문화의 메카로 만들려고 합니다. 최소한 국제 대회를 3, 4회 열고 매주 국내 경기도 열려고 합니다.”

―경기 자체로 이야기를 돌려 봅시다. 일반인들이 F1을 쉽게 이해하고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경기장에 와서 보면 팬이 됩니다. 하지만 모두 그럴 수는 없으니 상당수는 TV 중계를 보겠죠. 중계라도 재밌게 보려면 공부가 좀 필요합니다. 아는 만큼 재밌는 경기니까요. F1 관련 동호회나 블로그 등 인터넷에 자료가 널려 있습니다. 팀과 선수의 특성이나 F1 머신의 규정, 선수별 종합 득점 등을 알게 되면 정말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한국 경기에선 누가 우승할 것 같습니까.

“메르세데스GP팀의 미하엘 슈마허가 우승해서 재기에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슈마허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돈을 건다면 레드불팀 마크 웨버에게 걸겠습니다.”

인터뷰 중에도 그에게는 1분에 한 통꼴로 전화가 왔다. 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도 여럿이었다. 결재 서류도 수시로 들어오고 외국 손님까지 직접 찾아오니 2시간 이상 이어진 인터뷰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F1 유치라는 큰일을 해냈지만 정말 한국 F1의 ‘대부’로 자리매김하려면 첫 대회는 힘들더라도 2회, 3회 대회를 거듭하면서 F1 붐을 일으키고 국내 모터스포츠도 육성해야 할 것이다. 방을 나서는 기자에게 그는 “제발 신문에 사기꾼이라고는 쓰지 마라”고 웃으며 당부했다. 기자는 레드불팀의 제바스티안 페텔의 우승에 그와 내기를 걸었다. 지는 사람이 소주를 사주기로.

석동빈 mobidic@donga.com



::정영조 대표::

―1984년 조선대 무역학과 졸업
―1990년 호주 항공학교 ANAC 학장
―1996년 사단법인 한국자동차경주협회 (KARA) 회장
―1999년 스포츠코㈜ 대표이사
―1999∼2003년 국내 최초 창원 F3 개최
―2000년 수도권 첫 국제 카레이싱 대회

AFOS 유치
―2002년 국제자동차연맹(FIA) 아시아 모터스포츠 단체회의 멤버
―2005년 한국 F1 개최권 확보
―2006년 F1 한국 그랑프리 대회운영법인 KAVO 대표
―2009년 12월 FIA F1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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