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기자의 사람이야기]육영수 여사 36주기… 박지만이 이야기하는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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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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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환자 얼굴 쓰다듬던 어머니… 아버지도 대단하다고 자랑”

육영수 여사 36주기를 맞아 생전 여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지만 씨. 시종일관 밝고 겸손한 어투였던 그는 이날 “13년 우여곡절 끝에 최근 서울 상암동에서 첫 삽을 뜬 박정희기념관이 너무 외지고 좁아 기형적”이라며 “기념관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고 어떤 내용을 담을지 공청회 한 번 없이 진행되고 있어 자칫 국민 성금과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 될까 걱정스럽다”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육영수 여사 36주기를 맞아 생전 여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지만 씨. 시종일관 밝고 겸손한 어투였던 그는 이날 “13년 우여곡절 끝에 최근 서울 상암동에서 첫 삽을 뜬 박정희기념관이 너무 외지고 좁아 기형적”이라며 “기념관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고 어떤 내용을 담을지 공청회 한 번 없이 진행되고 있어 자칫 국민 성금과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 될까 걱정스럽다”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간밤의 폭우가 거짓말처럼 씻긴 15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묻힌 묘역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고 있는 시간, 이곳에서는 육 여사 36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추모객들 중에는 정치와 상관없는 일반 사람들도 많았다. 경북 구미에서 이웃과 버스 두 대로 상경했다는 백동숙 씨(64·구미시 은평2동)는 “육 여사는 한마디로 우리 세대의 어머니 같은 분”이라며 “매년 추도식 때마다 올라온다”고 했다. 2006년 추도식에 참석했던 소설가 남지심 씨도 육 여사 평전 ‘자비의 향기’에서 “피를 나누고 목숨을 나눈 사람도 잊고 사는 세태에 무엇이 여사를 찾게 하는 힘인가’라고 묻고 있다. 비정하고 허망한 게 권력이건만 매년 광복절 현충원에 몰리는 추모행렬은 권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추도식이 있기 3일 전인 12일 오후 아들 박지만 씨(52)를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포항제철에서 나온 산업폐기물을 재활용하는 ㈜EG 회장을 맡고 있다. 생전 모친에 대해 듣고 싶다는 청에 따라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였다. 오랜 방황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유쾌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혼생활과 다섯 살배기 아들이 주는 평안함으로 읽혔다.

―모친이 돌아가신 날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였죠. 작은 누나(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 외할머니와 함께 (큰누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당시 유학 중) 광복절 경축식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었죠.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화면이 꺼졌어요. 곧 (청와대) 부속실에서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죠.”

박 씨는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청와대를 나섰다고 한다.

“작은누나만 시신을 확인했지요. 어린 제가 놀랄까 봐 그런 것 같아요. 더 있어봐야 소용없다고 누군가 우리를 다시 청와대로 데려왔죠. 얼마 후 아버지가 오셨는데 저를 끌어안고 막 우셨어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총탄에 맞은 육 여사는 5시간 40분간 대수술을 받았지만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오후 8시 15분 청와대에 도착했다.)

―자식들에겐 어떤 분이셨나요.

“예의범절을 강조하셨고 거짓말을 하면 호되게 꾸중을 들었지요.”

―예의범절이란 뭐였죠.

“잘난 척하지 말고 남 무시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거였죠. 남들의 부러움을 사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보다 좋은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가져 본 기억이 없어요. 학교 다닐 때도 될 수 있는 한 시내버스나 전차로 통학했어요. 어머니는 늘 ‘언젠가 신당동 집으로 돌아갈 텐데 특별대우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하셨죠”라고 회고했다.

―모친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었나요.

“그렇지 못했어요. 저녁식사를 마친 뒤 저희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도 당신 방으로 들어가 일에 몰두하셨어요. 늦게까지 서민들의 하소연이 담긴 편지를 일일이 읽고 답장을 하시느라 바쁘셨죠. ‘엄마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저녁식사 자리는 어땠나요.

“어린 저에게는 좀 재미가 없었죠.(웃음) 재산 모으는 것,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말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늘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뿐이셨어요. 어머니는 신문 사회면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 사연이 실리면 꼭 가서 보고 오셨어요. 그리고 ‘가슴이 아파 그냥 올 수 없었다’거나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셨지요.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 계셨고요. 가족 식탁에서 무슨 ‘쇼’가 있을 수 없잖아요. 두 분의 말과 행동은 항상 ‘진심’이었습니다.”

도와주되 자립심을 키워주는 봉사로도 유명했던 여사는 생전에 ‘성의 없는 봉사나 구제는 혐오, 열등의식, 이타심을 길러주어 도와주지 않는 것만 못하다. 베푸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진심으로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육 여사는 남편에게 쓴소리를 잘하는 내조로도 유명했지요.

“생활이나 다른 면에서는 아버지 뜻대로 하셨지만 정치를 둘러싸고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린다거나 아버지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야기하셨어요. 대개 아버지가 틀리고 어머니가 맞았죠.(웃음) 아버지도 처음엔 아니라고 우기시다가 결국 ‘당신 말이 맞더군’ 하셨어요. 큰소리는 아버지가 치셨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모두 아버지와 국가를 위한 일이었지요.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분이었던 것 같아요.”

박 씨는 “돌아보면 두 분이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어머니가 특히 나환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자식들에게 ‘너희 어머니 정말 대단해, 대단해’ 하시면서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전했다. (육 여사가 나환자들의 잘려나간 손을 잡아주고 문드러진 얼굴을 쓰다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패기가 많이 약해지신 것 같았어요.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멍하니 앉아계신 모습도 많이 보았으니까요. 항상 모든 일에 ‘어머니도 보고 계실 것’이란 표현을 많이 쓰셨어요. 제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고도 하셨죠.”

―박 회장의 삶도 바뀌었죠.

“사춘기가 그때부터 온 것 같아요. 게다가 어머니가 결국 경호 문제로 돌아가신 것이어서 돌아가신 뒤 경호가 무척 엄했어요. 그때는 경호란 게 ‘남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이어서 어딜 가나 주목을 받고 특별대접을 받는 게 싫었어요. 친구들까지 저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주의를 받는 것도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고요.”

화제를 바꿨다.

―요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지어지고 있지요.

“상암동에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국민성금이 500억 원 이상 걷혀 유족의 한사람으로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약간 올라갔다.

“너무 좁고 외져요. 그동안 유족 처지에서 조심스러워 자제했는데 사업회에서 너무 유족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합니다. 주차면도 15면이었던 것을 겨우 40면으로 늘렸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처음에 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아예 1.5km나 떨어져 있는 월드컵경기장을 주차장으로 쓰라고 했을 정도였어요. 더구나 지금 짓는 것은 기념관이라기보다 마포구 시립도서관 내 부대시설입니다. 이름도 ‘박정희 기념·도서관’이에요. 용지도 1000여 m²(300평)에 불과해 기념관의 주요 기능인 연구, 교육은 엄두도 못 냅니다. 동상 하나 세울 공간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기자는 인터뷰 후 실제로 상암동 건립용지에 가 보았다. 공사 담장이 높게 쳐져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는 산이 막혀 있고 오가는 사람도 적어 한눈에 봐도 접근성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13년째 우여곡절을 겪으며 짓고 있는 사연이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박 씨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이나 현재 짓고 있는 부시 대통령 기념관의 경우 설계부터 유족이 위원회 멤버로 참석해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하는 것과 비교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념관은 한 번 지으면 다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3년 전부터 기념사업회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묵묵부답이어서 가족 친척 모두가 안타까워한다면서 말이다.

“서울시에 여쭤보니 더는 다른 땅이 없다고 하기에 어머니가 만드신 어린이회관 안에 지을 수 있도록 협조를 하려고 합니다. 용지도 4000평(1만3223m²)이나 되고 대학과 지하철도 가깝고 땅도 넓으니 제대로 된 기념관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책정된 예산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장기적으로는 더 절약되지요.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박정희기념관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자라는 세대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교육의 현장이 되어야 하며 산업화 세대를 상징하는 기념관이 되어야 한다”며 “아들 처지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기념사업회가 독단적으로 추진하지 말고 기념관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 공청회라도 열어 국민들과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국민의 성금과 세금을 제대로 쓰는 일”이라고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이라는 박 씨의 말을 들으며 생전 박 전대통령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읽혔다.

작가 홍하상 씨는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에서 ‘늘 가난한 사람을 만났고 고통 받는 이들의 편이 되어 눈물을 흘렸던 여사의 진정성이야말로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였다’고 했다. ‘안과 밖이 똑같았던, 사심 없는’ 친서민 삶을 살았던 육 여사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요즘 정치를 보고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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