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동학]<8>日해외문물 수용과정에 관심 ‘일본 대외관 강독회’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日 옛문자 익혀 개항기 대외정책 이해”

‘일본 대외관 강독회’ 회원들은 일본 역사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위해 일본의 옛 문자인 ‘소로분’을 익혀가며 문서를 읽는다.
오른쪽부터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안재익 서울대 대학원생, 이은경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구지회 숙명여대
대학원생, 조국 서울대 대학원생, 김경옥 숙명여대 대학원생. 홍진환 기자
‘일본 대외관 강독회’ 회원들은 일본 역사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위해 일본의 옛 문자인 ‘소로분’을 익혀가며 문서를 읽는다. 오른쪽부터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안재익 서울대 대학원생, 이은경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구지회 숙명여대 대학원생, 조국 서울대 대학원생, 김경옥 숙명여대 대학원생. 홍진환 기자
“대포와 군함을 네덜란드나 미국의 직인(기술자)을 불러들이셔서 빨리 제조하도록 하시고 일본의 직인들로 하여금 배우게 해서 일본인들로도 능히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853년 7월 후쿠오카 다이묘(봉건 영주)의 머릿속은 속히 개항을 해 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막부(幕府) 정부가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에 대해 각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자 상소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한 것이다. 자신이 경비를 맡고 있는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이미 해외 정보를 많이 접한 결과였다.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를 공격한 동향을 언급하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유럽을 둘러본 뒤 군함과 대포를 갖춘 사실을 사례로 들며 일본도 서둘러 대포와 군함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에도시대 영주 상소문 등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 읽기


지난달 30일 오후 5시 서울대 국제대학원 402호 일본학연구소 세미나실은 19세기 중반 일본 에도 시대의 한 영주가 막부에 올린 상소문이 당시 시대 상황과 버무려져 읽히고 있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주도로 2년 전 만들어진 ‘일본 대외관 강독회’는 매주 금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모여 일본 소로분(候文·우리의 이두와 비슷한 일본 옛글)으로 된 사료를 읽으며 일본의 대외관을 연구하고 있다.

박 교수는 “이 시대 일본 다이묘들은 상당히 많은 서양의 동향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 화란(네덜란드)과 중국의 상인들을 통해 접한 소식이었다”며 “다이묘들이 정보망을 통해 접한 소식과 의견을 막부 정부에 보고하는 서신을 보면 당시 지배계층의 대외관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가사키는 서양 문물을 접하는 대동맥이었다. 이은경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17, 18세기 나가사키에 있던 네덜란드 상인 대표는 다이묘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양의 춤을 보여주고 키스를 하는 풍습을 설명하느라 진을 다 빼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개항을 통한 무장을 주장한 집단은 선조들이 외국의 지식인과 기술자를 불러 일본의 자양분으로 삼은 사례를 들었다. 막부 초기에 서양 지식인을 정부의 고문으로 활용했고, 왕조 때는 백제의 오경박사를 불러 문물을 익힌 사실이 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메이지유신 훨씬 이전부터 ‘개항 통한 무장’ 목소리 커”

일본의 침략적이고 팽창적인 대외관은 이미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담론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 강독회 참여자들의 의견이다.

후쿠오카의 다이묘는 심지어 이런 주장까지 펼친다. “모쪼록 일본도 지금 이국과 조금씩 전쟁이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러시아와 통상을 허락하시게 된다면 프랑스 영국도 찾아올 것이 틀림없는데, 이들 나라의 배를 시험 삼아 무찔러 보길 바랍니다.”

일왕과 무국(武國)에 대한 일본의 자기 인식은 깊고 심대하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에도 시대에는 상층 서민에게도 그런 사상이 퍼지던 시기로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왕을 기반으로 한 국가관이 확립된다는 것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일본 우월주의 사상으로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를 배출한 에도 시대의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蔭)의 ‘외전통략’을 분석한 박 교수는 “관념상의 일본 우위가 명백히 표출된 것이 아시아에 대한 침락적 태도”라며 “서양과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일본 우위에 대한 욕망을 아시아에서 실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독회 모임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중국 상인들이 드나들던 시절 나가사키에서 탄생한 ‘나가사키 짬뽕’으로 저녁 식사를 한 뒤 대외관 강독회 회원 일부가 참여하는 또 다른 연구모임 ‘일본 초서체 강독회’가 오후 9시까지 열렸다. 두 모임은 소로분을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여서 숙명여대 대학원생 2명도 매주 참석하고 있다.

대외관 강독회에 참여하고 있는 박 교수와 류미나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허지은 서강대 시간강사, 최은석 도쿄대 사료편찬소 객원연구원 등은 연구 소모임 결과를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달 31일 ‘18세기 말-19세기 전반 일본의 대외관 연구’ 보고서로 발간했다.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메이지 유신 이전 심지어 페리 내항 이전에도 이미 일본 지식인들은 상당한 정도의 서양과 세계 지리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