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57년만에 받은 소년병 제대증

  • 입력 2009년 5월 12일 03시 03분


소년병 활동 당시 기록을 일기로 남겼던 손주련 옹이 본보 보도가 나간 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1일 경기 안성시 자택에서 손 옹이 국가유공자증서와 본보에 실린 기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홍진환 기자
소년병 활동 당시 기록을 일기로 남겼던 손주련 옹이 본보 보도가 나간 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1일 경기 안성시 자택에서 손 옹이 국가유공자증서와 본보에 실린 기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홍진환 기자
6·25참전 77세 손주련 옹,본보 보도후 참전사실 확인

국가유공자로 최종 인정,말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11일 경기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손주련 옹(77)의 자택. 풋풋한 열아홉 살 때 M2 소총을 잡았던 손 옹의 손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소년병 제대증을 꺼내든 그 쭈글쭈글한 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6·25전쟁 때 소년병으로 참전한 사실을 공인받기까지 57년간 고였던 눈물이었다.

올해 2월 본보는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했다. 6·25전쟁 당시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1년 10개월(1951년 2월∼1952년 11월) 동안 소년학도병으로 참전해 북한군과 사투를 벌였으나 이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연이었다.

▶2009년 2월 14일자 A11면 참조

▶“죽었다… 부모님, 누님, 조카 다 죽었다”

보도가 나간 지 두 달 만에 손 옹은 국방부로부터 소년병 제대증인 ‘참전 사실 확인서’를 받았다. 얼마 뒤엔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됐다. 그에 따라 이달부터 매달 8만 원의 정부지원금을 받게 된다. 보도 직후 한나라당 김용태 의원이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손 옹을 돕고 싶다”고 나섰고 손 옹도 국방부와 보훈처를 여러 차례 찾아 끈질긴 확인 작업을 거친 끝에 얻은 성과였다.

손 옹은 그동안 소년병으로 참전한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번번이 ‘인우(隣祐)보증’의 벽에 부닥쳤다. 6·25전쟁 당시 함께 부대생활을 했던 동료들에게서 보증을 받아야 했던 것. 그러나 전쟁 후 전우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나이도 여든에 가까워지면서 연락이 닿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북5도청과 참전유공자회 등 관련 단체에도 수없이 문의했지만 응답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 의원의 소개로 국방부의 해당 실무자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우보증’이 아니라도 길은 있었다. 지난해 6월 관련 훈령이 개정되면서 인우보증을 확보할 수 없을 경우 참전 사실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나 진술을 심사해 군복무 여부를 가릴 수 있게 된 것.

3월 손 옹의 사례를 접수한 국방부 인사기획과 이범률 원사는 “어르신이 당시 상황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고 당시 학도의용군동지회에서 참전용사로 등록하라고 보낸 문건도 잘 보관되어 있어 소년병 근무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만했다”며 “그동안 복무 사실을 보증해줄 전우들만 애타게 찾아다니신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고 말했다. 손 옹은 이 원사의 설명에 “50년 넘게 나를 쩔쩔매게 했던 문제가 훈령 하나 바뀌고 나서 단번에 해결이 되니 참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허탈하다”고 했다.

국방부로부터 “잘 해결될 테니 집에서 기다리시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귀가했지만 손 옹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속절없이 기다렸던 상처 때문이었다. 소년병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어두운 기억을 여러 번 되살려 진술하느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히 일은 일사천리였다. 3월 말 국방부에서 참전 사실 확인서가 나왔고 이를 제출받은 국가보훈처는 3주 만에 손 옹을 국가유공자로 최종 인정했다.

그 다음 달인 4월 중순, 손 옹이 밭일을 마치고 집에 오자 아들은 노란색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대통령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서가 들어 있었다. 그걸 꺼내든 손 옹은 주저앉아 말없이 울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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