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 부모님, 누님, 조카 다 죽었다”

  • 입력 2009년 2월 14일 02시 58분


77세 손주련 옹 북한군 맞서 옹진반도 지켜

“눈 감기전 국가위해 싸운 경력 인정받고파”

13일 펼쳐 본 손주련 옹(77)의 일기장은 흙색으로 바래 있었다. 누런 골판지를 손바닥 크기로 잘라 상단 모서리를 실로 묶은 조그만 노트의 첫 장에는 ‘iL Ki’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국군 소년병으로 활동했던 6·25전쟁 당시 북한에 점령당했던 고향 땅에서 밤에는 적진을 염탐하고 낮에는 땅굴에 숨어 지내며 쓴 전쟁의 기록이었다.

손 옹은 1932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백령도 옆에 위치한 옹진반도는 38선 남쪽으로 불과 3km 떨어진 곳으로 휴전선이 생기면서 인천의 부속도서로 편입됐다.

그는 읍내의 중학교를 다니다 고향 집에 들러 가족들과 휴일을 보내고 일요일 새벽 집을 나서던 길에 6·25를 맞았다.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4시의 어둠을 가른 건 눈앞에 떨어진 포탄이었다. 손 옹은 당시 얼굴을 달구던 열기와 거대한 흙바람이 볼에 부딪히던 따가움, 귀가 먼 것 같은 고막 속 고요함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피란민의 행렬을 따라 해변으로 도망쳐 무작정 배를 타고 인근 창린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하던 중 손 옹은 “고향 탈환 작전에 나설 학도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소년병에 가입했다.

손 옹은 열흘간의 속성 군사훈련을 마친 뒤 소년특공대원으로 뽑혀 고향에서 북한군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낮에는 땅굴에서 잠을 자고 밤에 나와 적의 동태를 살폈다.

밤새 근무를 하고 이른 아침 땅굴에 복귀하면 손 옹은 어김없이 일기장을 폈다. 목숨을 건 작전에 성공해 느꼈던 환희부터 가족들이 열병으로 죽고 두 형마저 북한에 납치되는 아픔까지 2년간의 희로애락이 그곳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전쟁일기는 58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옹진이 북한과 인접해 있어 ‘빨갱이’들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포항 이남에서 활동한 소년병들만 국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았던 것.

그는 휴전 5년 뒤인 1958년 대한학도의용군동지회로부터 소년병 근무 사실을 신고하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신고 당일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소년병 활동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손 옹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1952년부터 58년 동안 한 번도 일기장을 꺼내 보지 않았다. 지난 설 때 지인의 권유로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에 나섰지만 보훈청은 당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손 옹은 “눈을 감기 전에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작은 명예를 회복하는 게 소원”이라며 “국가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억해 주지 않으면 나라가 힘들 때 누가 선뜻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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