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에 돈이 뭐기에 가족간 송사 안타까워”

  • 입력 2006년 3월 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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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준 뒤에 노후를 책임지기로 한 자식들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며 자식들을 상대로 소송을 내러 찾아왔어요.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는지…가슴이 아팠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원도우미(민원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강선희(姜鮮嬉·69) 할머니는 최근 들어 ‘돈 문제’로 가족이나 친인척, 가까운 지인들끼리 송사(訟事)를 벌이는 일이 많아졌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화여대 법과대학 8회(1960년) 졸업생인 강 할머니는 벌써 6년째 거의 매일 법원에 나와 법을 몰라 고생하는 민원인들을 도와주고 있다. 법원도우미 가운데 최고령이지만 가장 열심히 일한다.

강 할머니가 법원 민원도우미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3월. 당시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6개 대학 법대 동문들을 대상으로 민원업무를 도와줄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53명이 민원도우미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1년도 안 돼 그만뒀고 강 할머니 혼자 남았다.

강 할머니는 “생애 가장 보람된 일을 하면서 노경(老境·나이가 많은 시절, 황혼)을 걸을 수 있어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는 바람에 법조인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법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가족’이 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 취임식 때 강 할머니를 초대하기도 했다.

강 할머니는 지난 6년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용산구 청파동 집에서 전철을 타고 서초구 서초동 법원으로 향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법원 곳곳을 다니며 민원인들을 돕는다.

“내가 책상에 그냥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안 찾아와요. 직접 법원 곳곳을 찾아다니며 ‘어려운 일 없느냐’고 물어보죠.”

강 할머니는 가처분 호적 이혼 개명 등 민사사건은 물론 형사사건 탄원서에 이르기까지 직접 소장을 들고 찾아온 이들의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준다. 글을 쓸 줄 모르거나 장애로 손을 쓸 수 없는 사람이 찾아오면 대신 글을 써주기도 한다.

강 할머니는 “요즘같이 돈 벌기 힘든 세상에 법무사 비용 대기가 힘든 사람도 많다”며 “내가 도와준 소장으로 승소했다며 찾아와 큰절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풀 죽은 표정으로 파산 신청을 하러 온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일 식대 1만 원을 쪼개 법원 구내식당에서 식사 한 끼를 사주며 ‘용기 잃지 말라’는 말을 건넨다.

강 할머니는 “법도 세상도 바뀌었는데 배워야 남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 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정법률 상담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요즘도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 법전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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