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버린 골프여왕 박세리]포커페이스의 「승리 눈물」

  • 입력 1998년 7월 7일 19시 28분


아버지를 얼싸안고 울어 버렸다. 우승 순간에 번진 ‘터미네이터’처녀의 눈물.

함께 라운딩한 쟁쟁한 세계 톱 프로들이 말했다. “박세리의 무표정과 담담함에 질리고 말았다”고. 외신기자들은 골프 기량과 정신력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는 외계인 같은 ‘터미네이터’처녀 골퍼의 출현이라고 썼다.

박세리. 스물한살 처녀.

7일 미국 여자오픈 골프대회 사상 ‘가장 어린 선수 둘이서 겨룬 가장 긴 20홀 연장전’에서 짜릿한 승리를 안는 순간 그녀도 더는 ‘포커 페이스’로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두달전 또다른 메이저 대회 맥도널드 챔피언십 우승때는 함박 웃음뿐이었다. 볼에 키스하고 두팔을 펼쳐 올리는 제스처 정도였다.

왜 이날만은 두뺨이 흠뻑 젖도록 울고 말았을까.

동갑내기 아마추어인 추아시리폰(태국계 미국인)과 다섯시간이 넘는 대혈전을 5m 버디 퍼팅으로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거기,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 보다 높은 ‘세계정상’의 자리는 참으로 더디게 어렵게 다가갈 수 있었다. 모래에 빠뜨리고, 물속에서 쳐내야 했다. 짧은 퍼팅을 손끝의 착각으로 수없이 놓쳐야 했다. 누가 말했던가 ‘승부는 한 순간의 착각’이라고.

마지막 퍼팅이 홀에 빨려들어가자 그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멎어버릴 것 같은 가슴을 가까스로 추스르던 아버지 박준철씨는 벌떡 일어나 그린 위로 내달았다.

“세리야!”

아버지의 그 넓은 가슴에 안기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고통과 질곡의 순간들.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사흘 낮밤을 벙커샷으로 지샌 어느해 여름. 아버지의 엄명을 못이겨 15층 아파트 계단을 아침마다 수없이 뛰어 오르내리던 기억. 한 밤 공동묘지에서의 정신력 가다듬기. 연습 또 연습으로 이어지는, 그래서 시합때가 되어야 ‘편한’ 골퍼생활….

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어머니 김정숙씨도 눈물이 아니고는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염조차 깎지 않은 아버지의 볼에 얼굴을 비벼대며 박세리가 흘린 눈물은 실의에 빠진 국민의 시름과 좌절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청량제가 되었다.

〈권순택기자〉maypole@donga.com

[박세리 고향-집 반응]

○…“세리야, 또 해냈구나.” 98 US여자오픈골프대회에서 박세리선수(21)가 우승을 확정지은 7일 오전 6시경 대전 서구 월평동 박선수 집.

TV를 지켜보던 언니 유리씨(27)와 동생 애리양(18) 등 20여명의 식구와 친척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박선수의 할머니 맹숙자씨(80)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유리씨는 “세리가 물가에 떨어진 공을 쳐내기 위해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 때 모두 조마조마했다”며 “어제 전화를 걸어와 연장전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이더니 결국 해냈다”고 말했다.

○…홍선기(洪善基)대전시장은 이날 오전 8시경 박선수의 집을 찾아 할머니 맹씨에게 “초 중 고 일반부가 참여하는 ‘박세리배 아마추어 골프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선수의 출신 고교인 충남 공주의 금성여고는 이날 ‘장하다 세리야’‘세리언니 잘하셨어요’ 등 박선수의 승리를 축하하는 교직원 학생회 동문회 명의의 플래카드 4장을 제작해 학교와 시내 무령왕릉 입구에 내걸기로 결정.

이날 전병용(全炳庸)공주시장도 금성여고를 찾아 “공주시민의 영예”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에 앞서 금성여고 교사와 기숙사 학생 50여명은 전날 11시부터 시청각실에 모여 박선수를 응원했다.

〈대전·공주〓지명훈기자〉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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