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밥상머리에서의 ‘체험학습’[공간의 재발견/정성갑]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15일 2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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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고봉밥 두 그릇을 비웠다. 솜씨 좋은 큰형수가 만들어 온 양념게장이 매콤하니 맛있었고 막내 누나가 한 잡채도 감칠맛이 났다. 올해 아흔이 된 엄마는 전라도가 고향임에도 음식 솜씨가 형편없는데 조기구이만큼은 기막히게 잘한다. 따끈하게 나온 조기 몸통을 젓가락으로 부드럽게 가른 후 하얀 속살을 김 폴폴 나는 흰밥에 올려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우리 집은 보기 드문 대가족. 나는 3남 3녀 중 늦둥이 막내인데 각자의 배우자와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나이도 제각각인 조카들까지 합하면 거실에 큰 상을 두 개나 차려도 다 앉을 자리가 없다. 이미 결혼해 딸, 아들을 낳은 조카도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나는 막내 할아버지. 매년 반복되는 풍경임에도 영 실감이 나지 않아 “내가 할아버지인 게 말이 되느냐?”며 웃는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대가족이라 밥상머리에서 오가는 대화도 버라이어티하다. 작은형은 요즘 당근마켓에 빠져 있다. 최고라며 요즘은 엄마 소파를 바꿔주고 싶어 열심히 살펴보고 있다고. 멀쩡하고 깨끗한 아이보리색 대형 소파가 눈에 들어오는데 가격은 60만 원. 한 번도 안 쓴 거라 그 정도면 괜찮은 가격이란다. 막내 누나는 시아버지 근황을 화제로 올렸다. 나이 들면 자식들 말도 안 듣는다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로워하던 시아버지가 큰 개를 집에 들였는데 수시로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그 개 때문에 몸에 상처가 났고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됐다고.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지루하게 견뎌야 하는 노년의 삶이 서글프게 와닿았다. 재미있게 놀다 몇 시간 후 하나둘 자리를 뜨는 것이 루틴. 나는 막내인지라 다른 식구들이 다 떠난 후 청소기까지 돌리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매년 눈에 띄게 쇠약해지는 엄마를 홀로 대면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장모님 댁에서도 밥을 맛있게 먹었다. LA갈비와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기도 했다. 역시 이야기꽃이 피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K장녀. 1980년대 이 땅의 장녀들은 모두가 서울로 올라와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는데 구로공단과 식모를 구하는 부잣집,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가 3대 직장이었다고. 올 초 큰 병치레를 한 장모님은 한층 나아진 모습이었지만 고독의 그늘도 공존하는 듯 보였다.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지금은 할머니가 세뱃돈을 주지만 나중에는 너희가 할머니 용돈도 드리고 내복도 사다 드려야 하는 거라고 말해 줬다. 집에 어른이 있어 따뜻한 밥이 나오고, 사람 사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노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명절. 나이 들어 밥상머리에 앉으니 부모는 그 존재만으로 많은 걸 느끼게 하고 가르쳐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설#밥상머리#체험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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