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지우려는 사람들에게[알파고 시나씨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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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서울대 외교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한국 민족주의와 관련된 수업을 들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한국의 개화 과정과 그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강의실에 있는 많은 사람이 당시 유교 주자학으로 인해 개화가 늦어져 현대화 과정을 빠르게 밟지 못했고, 결국 그 때문에 일본 식민 지배를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고 봤다. 이에 학생들은 주자학, 외교 사상, 더 나아가 조선 왕조에 분노하고 있었다.

알파고 시나씨 튀르키예 출신·아시아엔 편집장
알파고 시나씨 튀르키예 출신·아시아엔 편집장
필자는 이해하기 조금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조선 말기에 많은 이들이 개화를 막고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대 개개인들도 각자의 판단에 입각해 행동한 것뿐이다. 사실 당시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다. 침략적인 외세를 만나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비교적 짧았다. 좀 더 긴 시간에 걸쳐 판단할 수 있었다면 한국도 자주적인 힘으로 개화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구체적인 인물도 아닌 주자학, 유교 사상과 같은 추상적인 것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살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일명 ‘종북세력’이라는 사람들도 봤고 일본에 우호적인 이른바 ‘친일파’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어봤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은 ‘한국 역사에서 조선을 삭제하고 싶다’는 분들이었다. 종북과 친일은 적어도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 조선을 삭제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참 신기했다. 아니, 이들 말에 따르면 고려 이후 한국인들은 600년간 우주라도 갔다가 1945년에 다시 지구상에 내려왔다는 말인가?

조선이 한국의 역사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다. 필자는 화폐를 수집하는데, 다른 나라 지폐에는 현재 그 나라를 건국하거나 독립시키는 데 기여한 근현대사 인물들이 많이 들어간다. 한데 한국은 온통 조선 시대 인물들이다. 퇴계 이황은 뛰어난 유교 학자이고 필자도 그를 존경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대한민국 건설과 직접 관계된 인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찜찜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사실 필자도 좀 궁금했다. 왜 한국의 지폐, 동상 등 여러 기념물에는 대한민국보다 조선의 역사가 더 많이 투영돼 있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름 공부하고 취재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국이 현재 분단국가이고, 가장 최근 통일국가였던 때가 조선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통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는 국민에게 ‘남북은 원래 하나’였던 모습을 자꾸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보니 남북이 통일돼 있었던 가장 가까운 과거, 즉 조선 시대를 대한민국 역사보다 더 많이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 요즘 조선이 불편하다 못해 더 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까지 나온다. 광화문에서 조선 시대 위인인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제안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이들은 어느 시대 사람임을 떠나 생애 자체로 기릴 만한 위인들이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 한국사에서는 물론이며 인류 전체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해전을 펼친 장군이다. 그의 생애와 그가 펼친 전술과 전략을 보면 가히 세계 해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세계인들도 기억해야 하는 위인이 아닐까 싶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에서 세종대왕만큼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군주는 드물다. 세종은 과학자들을 지원함은 물론 그 스스로 과학 연구에 직접 참여해 조선의 과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깨어 있는 군주였다. 그 덕분에 창제된 한글은 그 자체로도 매우 훌륭한 문자일 뿐 아니라 한국 문화의 중추가 되었다. 태국에서는 태국 글자를 만든 람캄행 대왕을 너무도 존경해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도 못한다고 한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쯤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론은 시대가 아니라 그 인물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시대를 떠나 개인은 판단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또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기도 한다. 그걸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해 부정적인 면은 부정적인 대로, 긍정적인 면은 긍정적인 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로 우리 역사를 판단하고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알파고 시나씨 튀르키예 출신·아시아엔 편집장


#한국#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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