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소리, 그리고 헛소리[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0일 23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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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소리는 사람의 성대에서 출발해 듣는 사람의 귀로 전달되고 뇌에서 해석됩니다. 소리는 말과 다르나 의미를 포함하면 말에 가까워집니다. 예를 들어, 소리로 구성되는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즐거움을 줍니다. 말은 근본적으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몸짓이나 침묵도 나름의 방식으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나 영향력이 크지는 않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신분석은 말을 매개로 해 이루어지는 전문 활동입니다. 말은 피분석자와 분석가의 관계를 이어 줍니다. 분석가는 피분석자가 자유연상으로 풀어 놓은 말을 이해하고, 해석 기법으로 피분석자에게 자신이 이해한 바를 돌려줍니다. 피분석자의 말에는 의식적인 의미와 무의식적인 의미가 중첩돼 있어서 이해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말 자체를 조심스럽게 듣는 것은 기본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환상까지도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피분석자가 늘 이해하기 쉬운 말만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마음의 고통과 갈등을 속속들이 표현하면서 공감, 이해, 도움을 원하는 동시에 감추려고도 합니다. 이러한 무의식적 저항이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이어져 분석가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정반대의 상황으로 피분석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이를 듣고 있는 분석가는 그야말로 말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이때 의미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을 가려내지 않으면 분석가는 물론이고 피분석자도 결국 ‘익사’합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을 꺼내는 시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자마자 피분석자가 처음 꺼내는 이야기는 늘 중요합니다. 오기 전부터 미리 곰곰이 생각하며 준비한 이야기일 겁니다. 분석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꺼내는 이야기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피분석자와 분석가 모두 말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고 교묘하게 피하거나 엉뚱한 이야기로 덮으려 한다면 분석이 장애에 부딪힙니다. 피분석자가 불편하게 느낄 것 같아서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그 역시 분석을 정체시킵니다. 두 사람 모두 거짓을 이야기한다면 최악입니다. 분석에서 말로 나누는 대화는 정보와 의미의 전달을 넘어서 무의식과 환상까지도 다루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들리지만 뜻을 알기 어려운 말, 소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자주 접하면 분석이 오래 걸립니다.

세상에는 말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말들이 여기저기 떠돕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어렵습니다. 잘 들으면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갈등을 스스로 달래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서 위로를 받고 살아남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심하고 억지로 우겨서 남들을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이 풀어놓는 이야기로 혼란스럽게 해서 판단을 흐리게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반전을 일으켜 자신이 오히려 우위를 점하려는 겁니다. 둘째, 최악의 경우는 ‘막말 생성기’로 걸핏하면 막말을 풀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워낙 반복적인 연습으로 ‘전문성’을 키웠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만 합니다. 셋째, 궤변은 태생적으로 말보다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듣는 사람을 혼란시키고 그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미는 전술입니다. 이러한 여러 유형의 선동을 듣고 헛갈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부작용과 후유증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유형적, 무형적 피해도 늘어납니다.

막말의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면, 빠졌더라도 지혜롭게 살아남으려면 그런 말은 말이 아닌 소리로 여기고 대처해야 합니다. 우선, 말이 아닌 말을 ‘헛소리’라고 정확하게 표현해 온 조상의 지혜를 따르시길 제안합니다. 뇌에 병변을 앓고 있는 딱한 경우가 아니라면 헛소리는 모두 스스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거짓입니다. 무시하고 지나쳐야 정신 건강에 유익합니다. 방심하면 헛소리의 ‘블랙홀’에 스스로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초중력에 의해 우주의 가상적인 구멍으로 천체가 빨려 들어가듯이 당하는 겁니다.

헛소리 유포자는 좌절, 불안, 우울,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결사적으로 움직입니다. 그 사람의 본능은 이미 자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국으로 다가가고 있는 자신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막아내려고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일관성 있게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평정심이 이미 무너진 사람은 당황해서 장황하게 말을 하지만 의미 없는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우리는 말이 아닌, 소리가 오히려 힘을 얻은 혼돈스러운 인간 세상에 살아가면서 속아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 낼 방법을 궁리해야 합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말과 소리#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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