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은 요즘 밤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취임 4개월 만에 이른바 ‘외교 참사’를 이유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는 굴욕을 당했다. 그것도 핵심 외교상대국인 미국의 2인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방한 당일에 당한 일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해임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하루 만에 거부했지만 쉽사리 지워지진 않을 낙인이다. 역대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6명의 장관 중 5명은 스스로 물러났다.
민주당이 내세운 해임건의안의 이유를 따져보면 박 장관 혼자서 책임을 떠안을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일 관계의 민감함이나 일본 국내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섣불리 양국 정상회담을 발표한 것, “한일이 흔쾌히 합의했다”며 기대치를 불필요하게 높여놓은 건 모두 대통령실이었다. 한미 간 ‘48초 회담’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일정 조정이라는 현장 변수가 일부 원인을 제공했다. 국회를 들쑤셔놓은 비속어 논란은 대통령 본인이 자초했다.
박 장관은 4선의 거물급 정치인이다. 그는 “외교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그 당위성과는 별개로 정치 현실에서 외교가 늘 정쟁의 대상이었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제는 그 자신이 여의도 정치의 공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정의당이 언급한 대로 ‘왕자 대신 매 맞는 아이’가 돼버린 형국이다. 15∼18세기 유럽 왕실에서 감히 손댈 수 없는 왕자를 대신해 벌을 받았다는 ‘휘핑 보이(whipping boy)’와 다를 바 없다.
사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적잖은 기대를 모았던 스타 장관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영어 실력에 매끄러운 언변과 매너를 갖춘 그는 외교무대에서 환영받았다. 강제징용 피해 어르신을 찾아가 큰절을 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는 정치인의 강점도 드러났다. 장점만 부각됐던 건 아니다. 행사 사진에 신경 쓰는 그를 두고 ‘1000장 장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부처 소속 사진사를 전속처럼 데리고 다니며 행사 사진을 1000장씩 찍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과장된 표현 속에는 이미지 관리가 지나친 게 아니냐는 내부의 불만이 반영돼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 겸직이다 보니 박 장관은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지역구의 수해 현장에 달려가고, 명절에는 곳곳을 돌며 주민들을 만난다. 서울시 당정간담회 같은 의정 활동도 챙기고 있다. 정치인 출신 외교수장이 가져온 낯선 풍경들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5개월 만에 단명한 박정수 장관 이후 정치인이 외교장관을 맡았던 전례는 없었다. “자기 정치를 하려다 외교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우려를 털어내는 일은 결국 박 장관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다. 중국, 미국, 일본 등 주요국과의 민감한 현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늘어난 데다 러시아 전쟁으로 격화하는 신냉전 속 대외 상황은 연일 급변하고 있다. 경제안보 중요성은 커지는데 첫 시험대였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놓고 초반 대응을 잘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돼 있다.
사소한 의전 실수조차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된 국면에서 외교부는 살얼음판 분위기다. 현장 경험이 부족한 학자 출신 국가안보실 인사들의 빈틈을 메우는 것도 미션으로 추가돼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업무를 담당할 외교 실무자들을 통솔하는 게 박 장관이다. 그는 취임사에서 “외교는 실력이다”라며 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장관 본인부터 이를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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