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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상수룩’과 ‘독기룩’[2030세상/박찬용]

박찬용 칼럼니스트
입력 2022-08-09 03:00업데이트 2022-08-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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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상수룩’이라는 말을 보고 나도 뭔가 싶었다. 상수룩은 영화감독 홍상수의 상수와 특정 옷차림을 뜻하는 ‘룩(look)’의 합성어다. 여유 있는 실루엣의 바지에 적당한 셔츠를 넣어 입으면 상수룩이다. 언론에 노출된 홍상수의 모습 중 연파란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게 있다. 이 사진이 상수룩의 기원(?)이다. 지난해부터 이 조합에 여성도 편히 입는 ‘상수룩’이란 이름이 붙었고, ‘상수루크(サンスルック)’라는 이름으로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상수룩은 기능적으로 훌륭하다. 상의는 셔츠니까 그 나름의 격식이 있고 하의는 여유 있는 바지니 움직이기 편하다. 노출도가 적으니 몸이 드러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이나 전문직 여성들에게 최적화된 옷차림이다. 실제로 상수룩 관련 게시글에는 ‘나도 상수다’ ‘편해서 좋다’ 같은 반응이 많다. 홍 감독 본인이 상수룩을 얼마나 자주 입는지와 상관없이, 이미 상수룩은 매년 초여름마다 도시 여성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상수룩의 반대편 사분면에 ‘독기룩’이 있다. 독기룩의 어원도 인터넷 게시물이다. 어느 인터넷 익명게시판에 ‘회사에서는 조신한 척하지만 주말에는 클럽에서 중요 부위만 가리는 옷을 입고 남자를 만나려고 독기 가득하게 산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이 진짜인지 아닌지, 글쓴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으나 이 글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알려지면서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 노출이 많아서 여성의 몸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에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게 독기룩이다.

독기룩이라는 이름이 퍼지는 이유는 의미적으로 절묘한 동시에 어감이 웃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노출이 많거나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옷차림을 함축할 수식어가 없었다. 짧은 치마나 몸에 붙는 옷 같은 직설적 설명으로는 그 옷차림이 가진 함의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물론 딱 붙는 짧은 치마를 입은 모든 여성이 독기 어린 특정 목적을 가졌을 리 없다. 딱 붙는 옷을 독기라고 부른다면 그냥 농담처럼 들린다.

상수룩과 독기룩은 낮과 밤처럼 다르다. 상수룩이 업무시간 사무실의 옷차림이라면 독기룩은 심야 번화가의 옷차림이다. 옷 한 벌에 들어가는 물리적인 옷감의 양도 다르다. 당연히 독기룩의 옷감이 훨씬 작다. 옷감의 섬유 혼용률 역시 다르다. 상수룩은 식물계 섬유인 면 함량이 높고 독기룩은 몸에 붙어야 하니까 스판 등 석유화학계 섬유 함량이 높다. 둘의 공통점도 있다. 디자이너나 패션 미디어 등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부터 유래한 룩이라는 점이다. 익명의 여론이 트렌드를 반영하고 선도하는 한국의 특징이 엿보인다.

특정 연령대를 MZ세대라고 칭하는 일에는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현실의 젊은이들은 점점 세분된다. 상수룩을 입고 서촌 갤러리를 가는 젊은이와 독기룩을 입고 홍대 앞 클럽을 가는 젊은이들은 자주 찾는 쇼핑몰부터 즐겨 듣는 음악까지 모두 다를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상황과 세계관에 따라 같은 도시에서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상수룩과 독기룩은 이미 젊은이들의 세계가 잘게 나뉘었음을 암시하는 키워드일지도 모르겠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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