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신광영]절친인 미국-영국도 얼굴 붉히는 강제송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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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7일 판문점에서 북한 어민이 북한군에게 강제로 인계되고 있다. 통일부 제공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에서 북한 어민이 북한군에게 강제로 인계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신광영 국제부 차장
신광영 국제부 차장
미국 뉴욕 맨해튼 남쪽에 ‘조지프 도허티 코너’라는 교차로가 있다. 뉴욕시 의회가 1990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영국 송환 거부’ 투쟁을 벌인 아일랜드인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것이다. 그가 영국으로 송환되기 전까지 수감돼 있었던 교도소가 이 교차로 옆에 있었다.

도허티는 살인 탈주범이었다. 1980년 영국군 장교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는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를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 무장단체(IRA) 병사였다. 범행 후 붙잡혔다가 탈옥한 뒤 여권을 위조해 미국으로 도주했다. 영국은 그에게 ‘부재중 유죄 판결’을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도허티는 3년 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영국이 송환을 요구하자 미국 정부는 동의했다. 거부할 경우 미국이 테러범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고, 미국인을 살해한 테러범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송환을 요청할 때 협조를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도허티는 미국 독립투사들이 200년 전 영국 통치에 맞선 것처럼 정치범에 가깝다”며 1985년 ‘송환 불가’ 판결을 내렸다. 이후 도허티 송환 문제는 미 행정부와 사법부가 맞붙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정부는 어떻게든 판결을 무력화시키려 했고, 도허티는 송환을 막아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여야도, 여론도 둘로 갈렸다. 7년의 논쟁 끝에 1992년 미 연방대법원이 “영국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을 우려가 적다”며 추방을 결정했다. 도허티는 영국으로 송환돼 6년간 복역했다.

2019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때는 인질 4명을 납치 살해하는 데 가담한 2명의 이슬람국가(IS) 대원 처리가 문제였다. 영국 국적인 이들은 영국식 억양 때문에 수사관들로부터 ‘비틀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들 손에 처형된 인질 중에는 제임스 폴리 기자 등 미국인 희생자가 많아 미국 내에서 엄벌 여론이 높았다. 미국은 2018년 시리아에서 이들을 생포해 왔으나 유죄 판결을 하려면 영국으로부터 증거를 넘겨받아야 했다.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고려해 이들의 테러 가담 증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영국 대법원이 가로막았다. 테러범의 어머니가 정부 방침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내 승소한 것이다. 대법관들은 두 IS 대원에 대해 “그 어떤 살인보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괴물”이라면서도 미국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다고 보증하지 않는 한 형사소송에 사용될 개인정보를 넘겨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이들에 대한 최고 형량을 종신형으로 제한하는 데 동의하고 나서야 증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국가 간 범죄인 송환은 이처럼 해외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사례가 많다. 국익과 정의, 외교와 정치가 뒤섞여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국가들의 송환 사례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정부가 단독으로 결정하기보다 사법부의 판단을 거쳐 결론을 내리고, 중범죄자라도 고문과 사형이 자행되는 국가로는 거의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그렇게까지 지켜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관례의 근거가 되는 ‘범죄인 인도조약’이나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인권 보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범죄인 송환에 관한 여러 국제조약은 대량학살이나 전쟁범죄를 저지른 반인륜 범죄자의 경우 국경을 초월해 심판하는 ‘보편적 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 개념에서 시작됐다. 범죄자가 어느 나라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죗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고문과 사형이 만연한 나라에는 송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더해졌다. 그래야 추후 이뤄질 엄중한 처벌에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사마 빈라덴 같은 수천 명을 살상한 테러조직의 수괴라도 고문·사형 가능성이 높은 곳에는 송환하지 않는 게 이 원칙에 부합한다.

세계 각국이 범죄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때 사법부의 판단을 받는 것은 절차적 정의가 전제돼야 더 큰 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환 결정을 행정부에만 맡겨두면 국익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을 포기할 수 있어 견제 장치를 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IS 테러범 재판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던 2019년 말, 우리 정부는 살인 혐의가 있는 북한 어민 2명을 나포 5일 만에 강제북송 했다. 북송이 정당한지를 두고 이들이 우리 정부와 법적으로 다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흉악범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를 희생시켜 지켜낸 가치는 이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강제송환#치열한 논쟁#강제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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