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정은]中에 맞선 美의 21세기 외교전 채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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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안보, 신기술 등 中 겨냥한 5가지 목표
韓도 대북 외교 매몰되지 말고 큰 그림 그려야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지난여름 미국 의회에서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을 만났다. 회의장에서 마주친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북한 관련 질문에는 답 안 할 거예요”라며 손부터 내저었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로 재직하면서 북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던 때를 떠올린 듯했다. 기자는 “어차피 오늘은 북한에 대해서 묻지도 않을 생각이었다”고 받아쳤다.

비건 전 부장관이 의회에 출석한 이유는 ‘미국 외교의 현대화’를 주제로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기 위한 것. 국무부 ‘넘버 2’였던 그가 북한 외에 미국 외교의 실태와 개선점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외교관들에 대한 더 많은 투자와 훈련, 전문성 강화, 적재적소 배치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국무부의 문제점을 따져 묻는 상원의원들의 질문은 진지했다. 의회가 당장 시급성이 떨어져 보이는 외교의 업그레이드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석 달 뒤인 지난달 27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미국 외교의 현대화’라는 똑같은 주제로 연설을 했다. 행정부와 의회, 싱크탱크 전문가 그룹 등의 조언과 연구 작업을 총망라한 국무부의 업그레이드 청사진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미국 외교의 미래 비전과 방향성을 국무부 직원뿐 아니라 전 세계에 천명하는 선포식이나 다름없었다.

블링컨 장관은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우리의 업무와 자원, 우선순위를 더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며 “21세기 국무부를 더 강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민첩한 부처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앞으로 집중할 5개 분야로 △사이버 안보 △신기술 △세계보건 △기후변화 △다자외교를 제시했다. 중국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았지만 상당수 내용이 다분히 중국을 겨냥했거나 대중국 견제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들이었다. 국무부는 미국 및 동맹국의 후보들이 국제기구 수장 등 요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선거 지원을 전담하는 조직도 신설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막겠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그는 국무부 고위직을 10% 늘리고, 정보기술(IT) 업그레이드 예산을 50% 증액하겠다는 등의 구체적인 약속을 내놨다. “불만 제기는 애국적인 것”이라며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 쓴소리도 가감 없이 듣겠다고 공언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 팬데믹 상황에서 감염 위험에 놓였던 외교관들의 고충을 거론하며 “위험을 감수하고 일하는 외교관들과 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는 다짐 또한 잊지 않았다.

블링컨 장관의 연설을 들으며 한국 외교장관의 메시지는 어땠는지 떠올려봤다.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반복하는 발언 외에 기억나는 게 없었다.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 외교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장기적인 비전과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쿼드(Quad)’와 ‘오커스(AUKUS)’ 같은 안보 협의체들을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판도가 급격히 재편되는 상황에서 북한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게 우리 외교가 나아갈 길은 아니지 않은가.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중국#미국#21세기 외교전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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