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지키는 용기[이은화의 미술시간]〈177〉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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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솔웨이의 순교자’, 1871년경.
존 에버렛 밀레이 ‘솔웨이의 순교자’, 1871년경.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있을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해안가 말뚝에 묶여 있다. 밀물 때가 되면 찬 바닷물이 서서히 차올라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고, 왜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일까?

그림 속 여성은 17세기 스코틀랜드 위그타운에 살던 마거릿 윌슨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대한 영국 왕의 간섭을 거부한 운동단체 ‘커버넌터스’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왕을 포함해 그 누구도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1685년 5월 11일 윌슨은 제임스 7세를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선서를 거부해 익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당시 18세였다. 사형 집행관들은 나이든 신도 마거릿 맥래클런을 먼저 처형한 후 어린 마거릿을 회유했다. 존경하고 따르던 동료가 고통 속에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한 후였다. 그저 몇 마디의 선서만 하면 살 수 있었지만 윌슨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바닷물에 온 몸이 잠길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180여년 후 영국 화가 존 에버릿 밀레이는 윌슨의 순교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속 소녀는 실제 처형지였던 솔웨이 퍼스 해안 말뚝에 묶여 있다. 붉은 색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열어젖힌 블라우스와 타탄체크 치마를 입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입은 살짝 벌려 간절히 기도 중이다. 당시 밀레이는 저명한 화가였지만, 이 그림이 공개되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윌슨의 상체를 누드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죽음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지만, 어린 순교자의 누드화는 당시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밀레이는 윌슨의 머리와 상체를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그렸다.

신념을 지키려면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윌슨은 목숨 걸고 신념을 지켰기에 위대한 순교자가 됐고, 밀레이는 잘못된 신념을 버림으로써 오랫동안 사랑받는 명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신념#용기#미술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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