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이상해도 이상할 것 없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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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장 “간첩 잡는다” 당연한 말
이상하게 들렸으나 간첩사건 복선
文 “백신 확보 못해 죄송” 단 한마디
피하려다 문제 본질 호도, 정책 꼬여

박제균 논설주간
박제균 논설주간
딱 두 달 전인 6월 23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실정법에 따라서 간첩을 잡는 것이 국정원의 일이다. 국정원이 유관기관과 공조해서 간첩을 잡지 않는다면 국민이 과연 용인하겠는가.”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할 말이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 자주 벌어지는 문재인 정권의 국정원장이 느닷없이 간첩 얘기를 하다니…. 더구나 문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박 원장이 왜?

궁금증은 머지않아 풀렸다. 이달 5일 문 정부 들어 모처럼 ‘간첩’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간첩죄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 등으로 구속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이 물 위로 떠오른 것. 박 원장은 이 사건이 부각될 줄 알고 복선을 깐 것이다.

현 정부 들어 조성된 친북 환경으로 이들의 운신 폭은 넓어진 터. 간첩 혐의에 대한 증거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박 원장도 수사 지시를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 방기했다간 정권이 교체될 경우 국가보안법상 특수직무유기 혐의 등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임명권자의 뜻에 반해 국정원이 간첩 수사에 적극 나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없고….

그러니 정치 9단까지는 아니어도, 처세 9단쯤은 되는 박지원이 ‘실정법에 따라’ ‘국민이 용인하겠는가’ 등의 안전장치를 달아 미리 가스를 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간첩 사건이 터진 뒤, 공교롭게도 박 원장의 신변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흘러나와 여운을 남긴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간첩을 잡는다는 얘기가 되레 이상하게 들리는 나라, 그 이상한 일에 이미 무덤덤해져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이 나라, 과연 정상인가. 간첩이 진짜 없는 것이 아니라 안 잡아서 없는 대한민국, 참 평화로운 나라다.

그렇다. 우리는 코로나19 백신이 없어도 남부러울 것 없는 나라다. 지난 주말 루마니아가 한국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모더나 백신 45만 회분을 기부한다는 현지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외교부는 “무상 제공이 아니라 스와프”라고 부인했다. 백신 부족국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마음이 좀 그렇다.

한국의 백신 정책은 문 대통령이 이 말 한마디를 안 해서 실패하고 망가졌다. “백신을 미리 확보하지 못해 죄송하다.” 이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가. 대통령이 이 말을 안 하려다 보니 백신과 접종 정책이 꼬이고 헝클어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백신 부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어도 ‘우리에겐 K방역이 있으니 미리 준비할 필요 없다’더니 우려가 현실화되자 ‘백신을 개발한 나라에서 먼저 접종하는 건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정론에, ‘백신 안전성 문제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굉장히 다행스럽다’는 기막힌 정신승리법까지 등장했다.

잘못을 인정 않으려 하니 올 4월에는 ‘백신이 급하지 않다’ ‘화이자 모더나보다 아스트라제네카가 낫다’는, 전문성 떨어지는 발언을 한 사람을 청와대가 신설한 방역기획관에 임명했다. 그래서 그 방역기획관은 지금 어디에 있나. 백신 부족에 대한 국민 불만을 무마하려 1차 접종률을 높이다 보니 2차 접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이제는 ‘10월 말까지 전 국민 70% 2차 접종 완료’ ‘내년 백신 국산화’ 같은 희망고문을 들이민다.

이 모든 게 현 위기 상황에서 누가 봐도 백신 수급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회피하고 국무총리나 장관 등이 대타로 사과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탓이다. 이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 과정과 닮아도 너무 닮지 않았나. 문제의 핵심을 피하려고 백신에 대한 말을 요리 뒤집고, 조리 비트는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도 안쓰럽고, 거기에 일말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국민은 더 안쓰럽다.

하기야 그래도 문제 될 것 없는 우리나라다. 권력이 비판 언론의, 아니 지지 언론까지도 ‘입틀막’(입을 틀어막음)할 재갈을 씌우는 언론징벌법 등 일련의 폭주 입법을, 그것도 야당이 앉아야 할 안건조정소위 자리에 여당2중대 의원을 앉히는 독재 수법으로 해치워도 그리 놀랍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세상이 됐다. 이제는 나라보다 자라나는 아이들 교육이 더 걱정되건만, 그럼에도 대통령 지지율은 40%를 넘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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