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국민 버린 아프간 대통령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늘은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폭격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제가 재무장관이 됐을 때 3년 이상 살 가능성은 5% 이하라고 생각했죠. 아프간인 대다수가 하루 세 곳 이상의 라디오방송을 듣습니다. 세계(정세)가 중요하니까요.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이 뭘까요. 버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적 명사를 초청하는 지식콘퍼런스 TED 강연에서 2005년 아슈라프 가니 당시 카불대 총장은 소련군 점령 이래 아프간이 겪은 공포의 삶을 이렇게 전했다.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사실상 절반은 미국인으로 산 인물이다. 소련 침공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문화인류학자가 되어 세계은행과 미국 대학에서 근무했다. 미군의 탈레반 축출 이후에야 24년 만에 귀국해 재무장관으로서 정부개혁을 주도했다. 45년간 보유하던 미국 시민권은 2009년 첫 대선 도전을 위해 포기했다. 2014년, 2019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그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고 선거에 불복하는 경쟁자와 권력을 나눠야 했다.

▷카불 함락 며칠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가니는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비난하며 군벌과 국민에게 반(反)탈레반 저항과 봉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마지막 처신은 촌부보다 못 했다. 누구보다 먼저 줄행랑을 쳤다. 행선지조차 밝히지 않은 외국으로 도주했다. 카불 주재 러시아대사관 관계자가 전한 그의 탈출 행적, 차량 4대에 가득 찬 돈을 헬기에 실으려다 모두 싣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가니는 사흘 뒤에야 아랍에미리트에 체류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페이스북 동영상을 통해 “더 많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거기 남았다면 25년 전 일이 되풀이됐을 것”이라며 1996년 탈레반이 카불 장악 직후 당시 대통령을 공개 처형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며 먼저 떠올린 것은 좁은 하수구에서 피범벅이 돼 최후를 맞거나 수염이 덥수룩한 채 토굴에서 끌려나온 독재자들이었을지 모른다. 공포에는 지도자의 위신도 품격도 없다.

▷가니는 “아프간에 돌아가기 위해 상의하고 있다”며 귀국 의지도 밝혔다. “떠나올 때 내겐 옷 한 벌과 조끼, 샌들뿐이었다”며 자금 횡령 의혹도 부인했다. 하지만 국민을 버린 배신자, 실격(失格)한 지도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아프간에 남은 암룰라 살레 제1부통령은 가니의 부재에 따른 합법적인 임시 대통령을 자임했다. 가니의 귀국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지만 설령 돌아간다 해도 아프간에 그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아프간 대통령#아프간#탈레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