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어들[김창일의 갯마을 탐구]〈57〉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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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난바르 촬영을 위해 해녀 운반선에 승선했다. 여러 날 이 섬 저 섬을 돌면서 배 위나 섬에서 숙식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을 ‘난바르’라 한다. 운반선이 방파제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친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혔다. 물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선장은 배를 선착장으로 되돌렸다. 내친김에 해녀 할머니들의 숙소로 따라나섰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아서 물질을 며칠째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물질하는 날은 돈 벌어서 좋고, 궂은 날씨로 바다에 못 나가면 놀아서 좋단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서 40여 년 전에 부산으로 이주한 김 씨 할머니가 밀가루, 막걸리, 달걀노른자, 우유, 소금, 설탕을 넣고 반죽을 시작했다. 이런 날은 제주도에서 해 먹던 찐빵을 만들어서 함께 먹는단다.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해녀들의 웃음소리는 담장 밖을 넘어 골목길까지 흘렀다.

다음 날 다시 해녀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거제도와 가덕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와 바다 아래를 가로지르는 침매터널이 있는 병산열도로 향했다. “병산열도 앞쪽에 등대가 세워진 갯바위 보이지요. 가덕도에 살던 호랑이가 먹이가 없어서 거제도로 헤엄쳐 건너다가 저기에서 굶어 죽었답니다. 그래서 범여라고 해요.” 대죽도, 중죽도, 미박도, 구슬여, 노동여, 망덕여 등 선장은 섬과 갯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쉼 없이 이어갔다. 바다에 해녀를 내려주고 입항하면서도 선장의 설명은 계속됐다. 가덕도 주민과 거제도 주민 간 병산열도 쟁탈전에 관한 흥미진진한 전설을 듣는 사이에 배는 육지에 닿았다. 4시간 후 해녀를 태우기 위해 다시 출항했다. 망사리에 담긴 해산물의 편차가 심했다. 채취한 양이 다른데 수익금을 동일하게 나누면 많이 잡은 해녀는 불만이 없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막내가 적게 잡았지만 며칠 전에는 혼자서 우리 셋이 잡은 것보다 많이 채취했다. 경쟁하는 것보다 서로 도우며 일하고 똑같이 나누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필자는 동일한 이야기를 지난해 부산 송도 해녀를 조사하면서도 들었다.

한때 100여 명의 해녀가 있었으나 지금은 5명이 물질을 하는 송도 해녀작업장을 찾았을 때다. 10여 년 전부터 채취한 해산물을 공동으로 판매해 수익금을 동일하게 나누는 곳이다. “많이 채취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적게 잡는 사람이 있을 건데 갈등이 없느냐”고 물었다. 경쟁하지 않고, 함께 잡고 똑같이 나누는 지금이 행복하다며 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67세 해녀와 최고령 84세 해녀의 노동력 우열에 차등을 두지 않고, 공평한 분배와 노동 현장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제도다. 이는 독자적인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노인들도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 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 약자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된 것이다.

두 해녀 집단의 노동 방식은 탐욕, 이기심, 욕망을 제어하여 경쟁심과 갈등을 최소화했다. 권리와 의무에 차별이 없으며, 모두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호혜평등 관계다. 평등하게 노동하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대원칙은 효율의 극대화보다는 공동체 가치를 앞세운 생산과 분배 방식이다. 물론 소규모 집단이기에 유대관계 속에서 나눔, 배려, 포용하는 집단으로 쉽게 변모할 수 있었으리라. 거친 바다를 행복한 일터로 만든 해녀들을 따라다니며 필자도 일주일을 행복하게 지냈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행복#인어#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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