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서광원의 자연과 삶]〈2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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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가끔 바닷가 길을 걷는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걷다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들 겉이 만질만질하다. 기분이 처지거나 심란할 때 이 돌들을 만지작거리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딱딱한 돌에서 느껴지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거칠어지는 마음을 만질만질하게 해준다.

이 만질만질함은 어디서 온 걸까? 단단한 걸 보니 화강암이나 현무암일 텐데, 그렇다면 아마 수백 수천만 년 전 지구 저 깊은 곳에서 그 어떤 것보다 뜨거운 상태로 솟구쳐 나와 굳어졌을 것이다. 원래 바다에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다 바다로 흘러들어 갔을 수도 있지만 날이면 날마다 수천 번씩 파도에 씻기며 거친 모습을 떠나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돌 하나에 수백 수천만 년의 시간이 담겨 있는 셈이다! 온갖 세파를 다 겪은 이런 축적된 시간이 내 마음을 다독이는 건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알고 보면 오랜 시간의 결과들이 밤하늘에도 있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중 가장 멀리 있는 게 우리 옆 은하인 안드로메다 성운이다. ‘우리 옆’이라고는 하지만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참 먼 이웃이다. 1년 동안 빛이 가는 거리(약 9조5000억 km)를 1광년이라고 하니 빛의 속도로 달린다 해도 무려 250만 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별빛이 우리 인류가 생겨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옛날 출발했다는 뜻이다. 원시 인류인 호모하빌리스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 시절에.

이에 비하면 예로부터 밤길의 지표로 삼는 북극성 별빛은 그야말로 최근 것이다. 불과 400년 전 떠났으니 말이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중 가장 밝다는 시리우스 별빛은 8년 7개월 전 떠난 ‘아주 따끈따끈한’ 것이고 말이다. 반면 햇빛은 8분 만에 우리 눈에 도착한다. 세상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시인들이 햇빛보다 별빛에 더 눈길을 주는 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빛만이 아니다. 시인 박철은 ‘개화산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맞다. 높은 산은 대체로 최근에 생긴 것이다. 낮은 산은 생긴 지 오래되어 낮아진 것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기에 마음 편히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온 것이기에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많다. 우리도 이럴 수 있을까? 나이 들수록 부드러워진 단단함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밤하늘의 별들이 그렇듯 어두운 시간을 함께해 주며 좌표가 되어 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스타(star)일 것이다. 더 나아가 위치가 높아질수록 높은 산처럼 조용하고, 살면 살수록 낮은 산처럼 마음이 편한 자연을 닮으면 나쁠 일이 없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산#바닷가 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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