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갑식]아빠마음 딸마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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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22일(현지 시간) 오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머제스틱 극장에는 50m가 넘는 긴 줄이 늘어섰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기다리는 인파였다. 섭씨 2, 3도의 기온은 차가운 바람을 만나 한겨울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뉴욕의 그 유명한 ‘유령’을 찾아온 이들의 표정은 즐거웠다. 공연 끝날 무렵에는 공연장 주변을 급하게 빠져나갈 손님을 태울 인력거들도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묘한 데자뷔가 느껴졌다. 2001년 이 작품의 국내 초연을 앞두고 같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에도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14년째 공연 중인 히트 상품이었다. 이미 말로는 전해 들었지만 300kg이 넘는 샹들리에가 객석을 향해 떨어질 때 터져 나오던 객석의 놀라움과 감탄의 비명조차 생생하다.

16년이 지난 뒤 처지는 달라졌다. 주변 건물의 문을 바람막이 삼아 “공연아, 어서 끝나라”고 주문을 외는, 딸을 기다리는 아빠가 됐다. 여전히 비싼 티켓 가격에 같이 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내심 보고 싶었지만 이미 몇 차례나 봤다며 사양했다. 모처럼 큰마음 먹고 여행 왔는데 ‘이것도 투자’거니 생각했다. 다만, 30대 중반의 아빠가 느꼈던 그 문화적 충격을 10대 후반의 딸도 체험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공연과 관련한 대화는 짧았다.


아빠: 공연 어땠니? 샹들리에 떨어지는 장면은 놀랍지 않아?

딸: 볼만했어. 쉬는 시간, 조명이 켜진 상태에서 샹들리에를 다시 올려 좀 ‘깨더라’. 그런데 배도 고프고 추워.

(뭐라, 그게 전부니. 뮤지컬의 매력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다시 보고 싶다, 문화상품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이런 대답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나도 춥다, 추워)

##하루 전 뉴욕 맨해튼 남서쪽의 하이라인 파크를 찾았다. 이곳은 서울역 앞 고가에 조성된 ‘서울로 7017’의 모델이 된 곳이다. 2014년 마지막 구간이 완공된 이후 단숨에 뉴욕의 명소가 됐다. 낡은 철로의 흔적과 나무, 꽃 등이 어우러져 황량한 건물 사이로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빠: 여기가 서울역 앞 고가 길의 원형이야. 낡은 철로 보이지. 대단하다. 이런 아이디어가 21세기 세상을 바꾸는 거지.

딸: 그래, 그렇구나.

(뭐, 그게 다야. 침 튀기며 소개하면 서울역 앞도 한번 가자고 해야지)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남쪽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어바인시의 한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이날을 시작으로 미국 내에서 한 해 소비의 20% 안팎이 발생한다는 블랙프라이데이였다. 평소 쇼핑을 귀찮아하는 편이지만 함께 보고 싶은 현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의 빈 공간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쇼핑몰은 어깨가 쉽게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계산할 때도 긴 줄서기가 필수였다.

아빠: 정말 사람 많다. 말 그대로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네. 여기 바로 한국서 분위기 보겠다고 온 사람들도 있으니.

딸: 잠깐, 지금 바빠. 온라인에 여기보다 더 싼 물건 나왔거든.

(정말? 손 참 빨리 움직이네. 할 말 없다)

나중 확인한 내용이지만 올해 온라인의 블랙프라이데이는 더 뜨거웠다. 온라인 판매는 전년에 비해 17.9% 증가해 사상 최고였고, 이 중 40%가 ‘손가락(모바일) 쇼핑’이었다.

집안이 화목하고 자녀 교육이 잘되려면 아버지의 침묵이 필수라는 말까지 도는 세상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그런 분위기가 못마땅하지만 정작 대화의 기술은 한참 부족하다. 이른바 교과서 같은 말들이 대화를 막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딸들의 혼잣말을 못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아버지의 교과서 같은 말들#딸들의 혼잣말#아빠마음 딸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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