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장선희]“오이, 어이가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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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들어있지 않다는 안내문이 붙은 샌드위치. 인터넷 화면 캡처
오이가 들어있지 않다는 안내문이 붙은 샌드위치. 인터넷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장선희 문화부 기자
요즘 편의점이나 카페에서 디저트를 고를 때 새삼 놀라곤 한다. 빨간 과육 부분보다 녹색 껍질 부분이 더 길어진 ‘거꾸로 수박바’, 요구르트 얼려 먹기를 즐기는 이들을 위해 뚜껑 달린 파우치 형태로 제작된 ‘얼려 먹는 야쿠르트’….

이런 ‘취향 저격’ 제품들의 등장에 소비자들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거꾸로 수박바는 선보인 지 불과 10일 만에 100만 개가 넘게 팔렸고, 얼려 먹는 야쿠르트는 판매 초반 하루 평균 20만 개가 나갔을 정도다. 그뿐일까. 최근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찾았다가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반반씩 부은 커피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두 가지 취향을 한 번에 만족시키겠다’는 게 이 업체의 포부다. 화려하게 변신 중인 디저트를 보며 요즘처럼 사람들의 취향이 존중받는 때가 또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개인 취향을 존중받지 못해 서러운 이들도 있다. 1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오이를 못 먹는 사람들의 눈물 나는 경험담이 올라온다. “배달 온 자장면과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 점심을 굶은 적이 있다”거나 “오이 냄새를 맡으면 속이 울렁거려 오이냉국이 급식 메뉴인 날엔 조퇴를 했다” 등 오이에 대한 심각한 고충을 털어놓는 이들이 적잖다. 무엇보다 이 페이지의 ‘오이 기피자’들이 하나같이 공감하는 것은 “오이를 못 먹는다”고 밝혔을 때 으레 나오는 사람들의 ‘까칠한’ 반응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오이꼰대’(오이를 못 먹는다고 하면 무조건 편식으로 치부하는 이들) ‘오이코패스’(오이를 싫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라는 말까지 통용될 정도다.

사소한 취향 차이로 부득부득 싸우는 모습은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탕수육 튀김에 소스를 부어 먹는지 찍어 먹는지’ ‘과자봉지를 옆으로 찢는지 바로 뜯는지’ ‘마우스 휠을 중지로 쓰는지 검지로 쓰는지’ 등을 두고 누가 맞느냐는 식의 ‘댓글 배틀’이 벌어지기도 한다. 남이야 찍어 먹든 말든, 검지로 쓰든 중지로 쓰든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그런 글에 달린 댓글들은 각자의 오랜 신념이라도 담긴 듯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급기야 글을 쓸 때부터 ‘취향 지적은 사양한다’며 글 말머리에 ‘개취존(개인 취향 존중)’이란 경고성 신조어를 붙이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비단 먹는 것뿐이겠는가.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미혼의 40대 스타일리스트는 ‘비혼’ 소신을 밝혔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짜 안 해? 두고 보자”라거나 “너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같은 반응이 나와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실을 밝힌 뒤 주변의 걱정과 무수한 설득에 시달렸다는 친구 부부의 경험담, 번듯한 직장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고 선언했다가 ‘못난 놈’ 소리를 들었다는 대학 후배까지, 삶의 취향을 존중받지 못해 속상하다던 내 주변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오이가 미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기 때문일까. 한 김밥 브랜드가 ‘오이 없는 김밥’을 내놨고, 편의점에서도 ‘오이가 들어 있다’는 알림 스티커가 붙은 샌드위치가 등장했다. 사실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자’는 거창한 말은 필요 없다. 그저 내 주변 누군가의 사소한 취향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좀 더 넉넉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
#오이 없는 샌드위치#취향 저격 제품#사소한 취향을 인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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